2019년 99세를 일기로 타계한 존 폴 스티븐스 전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은 1976년 공화당 제럴드 포드 대통령에 의해 임명됐다. 그런데 34년 가까이 재임한 스티븐스는 민주당 버락 오마바 대통령 시절인 2010년 은퇴 의사를 밝혔다.
‘비록 나는 보수 정권에 의해 발탁됐으나 내 후임자는 진보 정권이 선택했으면 한다’는 의사 표시로 풀이됐다. 그가 쓴 미 대법원 역사에 관한 책이 2013년 국내에서 ‘최후의 권력 연방대법원’이란 제목으로 출간됐다. 여러 가지 내용이 있는데 그중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대법원장 및 대법관의 보수에 관한 불만 토로다. 스티븐스는 대법원장·대법관을 비롯한 연방법원 판사의 연봉이 너무 적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래서야 누가 법관이 되고 싶어 하겠느냐”고 아쉬움을 표했다.

오늘날 미 연방법원 판사의 급여는 스티븐스가 재직하던 시절보다는 올랐을 것이 분명하다. 대법원 산하 사법정책연구원 보고서 등에 따르면 2022년 기준으로 미 대법원장의 연봉은 28만6700달러, 대법관은 27만4200달러라고 한다. 요즘 급변하는 환율을 감안하더라도 대법원장은 한 해에 우리 돈으로 약 4억원, 대법관은 3억9000만원을 각각 받는다는 얘기다. 미국 유수의 거대 로펌(법무법인)에는 못 미친다고 해도 결코 적은 액수는 아니다.
한국은 어떤가. 대법원장 연봉은 2억원이 조금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대법관의 경우 1억5000만원가량이라고 한다. 평범한 직장인 입장에선 ‘고액 연봉자’라며 입이 벌어질 수 있겠으나, 한·미 양국의 물가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미국과 비교해 턱없이 적은 금액이라 하겠다.
노무현정부가 사법시험 폐지와 더불어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제도 도입을 결정하며 명분으로 든 것이 ‘법조일원화’다. 이는 로스쿨을 졸업한 뒤 검사, 변호사, 법학교수 등 다양한 직역에서 일정한 경력을 쌓은 법조인들 가운데 판사를 선발하는 것이 핵심이다. 2009년 로스쿨 개원 이후 어느덧 16년이 흘렀지만 법조일원화의 이상이 제대로 구현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실은 로스쿨 출범 당시부터 ‘대형 로펌에 취업해 활동하며 거액의 연봉을 받아 온 우수 변호사들이 선뜻 법관을 지망하겠느냐’는 회의론이 컸던 게 사실이다. 한국에서 판사가 아무리 명예로운 직위라고는 해도 월급이 로펌 변호사에 비해 턱없이 적다면 자질이 뛰어난 법조인들은 결코 법관 임용을 희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담겨 있다.

법률신문이 21일 ‘20년 경력 판사 연봉, 대형 로펌 신입 변호사 수준’이란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그에 따르면 법원을 떠난 퇴직 법관 대다수는 보수 등 ‘처우’를 가장 큰 이유로 꼽았다고 한다. 법원에서 판사로 10년간 근무한 어느 변호사는 “이 돈을 받고 이 정도나 되는 (엄청난) 업무량을 감당해야 하나 싶으면서 자괴감이 들었다”며 “내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고 싶어 법원을 떠나게 됐다”고 말했다고 하니 그저 참담할 따름이다. 헌법 27조 1항은 “모든 국민은 헌법과 법률이 정한 법관에 의하여 법률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했다. 이 기본권이 제대로 보장되려면 최고 수준의 실력을 갖춘 법률가를 판사에 앉혀야 하며, 그러려면 일정한 비용 지출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정부와 국회 모두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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