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전쟁은 흔히 일본의 침공으로 시작된 양자 간 전쟁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일본, 중국(국민당, 공산당, 군벌), 미국, 소련 등 여러 행위자가 서로 다른 목표를 추구하며 복수의 전쟁이 얽힌 ‘중첩전쟁’이었다.
1920년대 일본의 중국 시장 진출은 반일 민족주의의 고조 속에서 좌절되었고, 이는 일본 군부의 강경론을 부추겨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전면 침공으로 이어졌다. 일본은 중국이 쉽게 붕괴될 것이라 판단했지만, 광대한 영토와 인구를 가진 중국은 단기간에 무너지지 않았다. 전쟁은 곧 소모전으로 변했고, 돌파구를 찾지 못한 일본은 1941년 말 미국과의 전쟁까지 감행하며 전선을 태평양으로 확대했다.
중국 국민당의 최우선 과제는 통합된 국가 건설이었다. 군벌 통합과 공산당 제거가 급했기에 처음에는 전면전을 피하려 했으나, 일단 전쟁이 시작되자 이를 결집의 계기로 활용했다. 장제스는 전국적 지도자의 위상을 확보했지만 대가는 컸다. 산업 및 기반 시설은 대부분 파괴되었고, 중국 정규군인 국민당군은 크게 약해졌다. 종전 당시 중국은 외형상 승전국이었지만 내부 역량은 이미 소진된 상태였다.
반면 중국 공산당은 중일전쟁을 조직 확대의 기회로 삼았다. 일본군의 침공은 공산당이 국민당의 직접적인 압박을 피할 완충지대를 만들었고, 공산당은 유격전, 정치공작, 선전 활동을 적극 활용하며 자신들을 일본군과 가장 효과적으로 싸우는 세력으로 보이게 했다. 국민당의 통제력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은 공산당의 세력 확장 기반이 되었고, 종전 무렵에는 정치와 군사 양면에서 전쟁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성장해 있었다. 여기에 전쟁 말기 소련의 대일전 참전과 만주 점령은 공산당에 유리한 전략 환경을 제공했다.
미국은 중국군이 일본군 주력을 중국 대륙에 묶어두고 있다는 점, 중국을 일본 본토 폭격의 거점으로 활용할 가능성 그리고 전후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질서 구상을 고려해 장제스를 연합국 지도자로 대우하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전황 악화와 국민당 정부의 부패·비효율성, 지휘권을 둘러싼 마찰이 겹치면서 미국과 중국 간의 신뢰는 점차 흔들렸다. 그 결과 미국의 전략적 관심은 일본의 조기 패망을 위한 태평양 전선에 집중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당군은 미국의 요구로 버마 전선 등 외부 작전에 투입되며 전력을 소모했고 중국 전선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처럼 행위자들의 상이한 전략과 이해관계가 교차하는 가운데 중일전쟁은 중국의 승리로 끝났지만, 정작 그 승리의 주역이던 국민당은 이어진 국공내전에서 패배해 대만으로 밀려났다. ‘중첩전쟁’의 최종 승자는 공산당이었다. 오늘의 대만 문제는 이 역사적 흐름에서 비롯된 것이며, 현재의 중·일 갈등과 미·중 경쟁 역시 당시 형성된 구조적 균열이 장기간 누적된 결과로도 해석 가능하다.
심호섭 육군사관학교 교수·군사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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