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김정은 재회 가능성 제기
北·美대화에 ‘韓 패싱’ 우려도 커져
새 정부 발빠르게 존재감 키워야
“나는 빌어먹을 미치광이를 상대하고 있다.(I’m dealing with a fucking lunatic.)”
미국 일간 워싱턴포스트(WP)의 밥 우드워드 기자는 2021년 9월 발간한 저서 ‘위험(Peril)’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집권 1기 시절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미치광이(lunatic)’라고 불렀다고 밝혔다. ‘위험’은 백악관 인사 등 200여명을 인터뷰한 내용을 담았다. 이에 김 위원장은 당시 트럼프 대통령을 향해 ‘노망난 늙은이’, ‘늙다리 전쟁 미치광이’ 등으로 조롱했다. 하지만 비핵화 협상이 본격화되자 양측은 ‘러브레터’라는 별칭이 붙은 친서를 최소 27통 주고받았다.

트럼프 대통령 재집권 후 다시 또 친서 얘기가 나왔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 대화채널 복구를 위해 김 위원장에게 여러 차례 친서를 보내려 했지만 미국에서 활동하는 북한 외교관들이 수령을 거부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백악관은 “대통령은 김정은과의 서신교환에 여전히 수용적(receptive·열려 있다는 의미)”이라며 관련 보도를 부인하지 않았다.
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과 대화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것은 1기 때와 환경이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 정상회담이 ‘노딜’로 끝난 후 협상 동력은 회복되지 못했다. 북한은 ‘하노이 노딜’ 이후 과거와 같은 비핵화 협상은 절대 없다고 수차례 공언해 왔다.
북한은 이전보다 미국을 덜 필요로 한다. 우크라이나 전쟁 파병을 계기로 북한이 러시아와 밀착한 상황에서 급하게 미국과의 관계를 진전시킬 이유가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재집권 후 정치·외교 분야에서 ‘미치광이 전략(madman theory)’을 협상 기술로 쓰고 있다. 예측을 뛰어넘는 결정을 깜짝 발표하거나 예상치 못한 수준의 위협으로 전 세계를 쥐락펴락하고 있는 것이다.
‘관세 폭탄’으로 시장을 뒤흔들었다가 물러서는 행태를 반복하고, 2주 안에 공격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발표한 뒤 이틀 만에 이란 핵시설에 벙커버스터 폭탄을 투하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1기 당시에도 미치광이 전략을 구사한다고 평가됐지만, 집권 2기에서는 그 범위와 강도가 더욱 커졌다.
그동안 국제사회에서 미국 정상이 ‘신뢰받는 중재자’로서 입지를 높였던 것과 달리 트럼프 대통령은 ‘미치광이 전략’으로 세계질서의 전환을 도모하고 있다.
무역 관세와 중동에 이어 다음 목표는 북한이 될 가능성이 크다. 미치광이 전략을 펴는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이 미치광이라 부른 김 위원장과 다시 대면할 때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두 정상이 만난다면 10월 한국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계기가 될 수 있다. 2019년처럼 판문점에서 만날 수도 있지만 즉흥적이고,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두 정상이라면 북한이 지난 1일 개장한 원산갈마해안관광지구도 배제할 수 없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1월 취임 일성으로 “김정은이 해안가에 엄청난 콘도 역량(condo capabilities)을 보유하고 있다”고 밝힌 바로 그곳이다. 김 위원장은 심각한 경제난에도 국제사회와의 교류나 관광 유치를 목표로 2만명 숙박 능력의 호텔과 영화관·공연장 등 각종 레저시설을 갖춘 곳으로 개발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 위원장을 다시 대화 테이블로 끌어내려면 매력적인 유인책이 필요하다. 김 위원장에게 트럼프 대통령의 원산갈마해안관광지구 방문은 국제적 홍보 기회가 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서도 김 위원장과 다시 대화의 물꼬를 트게 되면 북·미 관계가 급물살을 탈 수 있게 된다. 유의미한 결과가 나온다면 트럼프 대통령이 그렇게 원하는 노벨평화상 수상 소망에 한발짝 더 다가갈 수 있다.
다만 문제는 북·미 정상 간 직접 대화는 한반도 평화에 긍정적이지만 한국의 입지가 위태로워지는 ‘코리아패싱’ 우려는 커질 수 있다. 아직 한·미 정상이 만나지도 못한 상태에서 우리의 역할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 실용 외교를 강조한 이재명 대통령과 입각을 앞둔 정동영 통일부 장관 후보자 등 새 내각이 북·미 사이에서 ‘운전자’든 ‘가교’든 존재감을 키울 수 있게 발빠르게 움직여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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