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세대를 키우는 책임분담 마땅히 사회몫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습니다. 오후반을 마치고 집에 왔는데, 벨을 눌러도 엄마가 대답이 없었습니다. 혹시 집을 잘못 찾아왔나 싶어 1층으로 내려가 입구를 다시 확인하고 올라가 몇 번이나 벨을 눌러도 돌아오는 건 낯선 적막뿐이었습니다. 엄마가 어딜 간 걸까? 책가방을 멘 채 계단에 쪼그려 앉아 기다리는 것 말고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었습니다.
집 열쇠를 목걸이처럼 걸고 다니는 친구들은 집에 들어갔겠지. 나도 엄마가 일을 했더라면 목걸이 열쇠로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갈 수 있었을 텐데… 생각하던 중 옆집 아줌마가 올라오시다 “왜 여기 앉아 있니?” 물으셨습니다. 엄마가 없다는 제 얘기를 듣고 “우리 집에 가서 기다리자. 금방 오시겠네” 하시며 제 손을 잡고 데려가셨습니다. 아줌마가 주신 과자를 먹으며 문 너머에 귀를 세우고 있자니 엄마 발걸음 소리, 문 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역시 엄마였습니다. 할머니를 모시고 급히 병원에 다녀오느라 자리를 비웠다며 미안해하셨습니다. 그 이후로도 몇 번 예고 없이 엄마가 없었던 날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옆집, 윗집에서 기꺼이 저를 들여 주신 덕분에 저는 돌봄 공백 없이 자랄 수 있었습니다. 무려 40년도 전, 이웃이 곧 안전망이던 시절이었습니다. 아직도 그 일이 생생한 걸 보면 아이에게 보호자의 존재 또는 부재는 그만큼 각인될 만한 일인가 봅니다.

지금은 맞벌이 가구가 절반을 넘는 시대입니다. 내 아이도 돌보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웃집 아이에게까지 손을 내민다는 건 현실적으로 쉽지 않습니다. 혹시 모를 오해와 책임 문제도 부담이 됩니다. 자녀 돌봄을 이웃 간 상부상조에 기대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돌봄을 ‘사회화’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최근 며칠 사이 두 차례 화재 사고로 네 명의 어린 생명이 안타깝게 희생됐습니다. 공통점은 부모가 일터에 나간 사이에 벌어진 참사였다는 것입니다. 보호자가 함께 있었다면 막을 수 있었을 비극 앞에서 자녀를 잃은 부모 마음은 감히 상상조차 어렵습니다. 이런 사고를 단지 ‘부모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요? 부모가 아이 곁에 있어야 하는 건 맞지만, 모두가 그럴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 사회가 돌봄 공백을 함께 메워야 합니다.
돌봄을 사회화한다는 것은, 부모 아닌 사람이 자녀를 돌보도록 가정 밖 서비스를 확대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돌봄을 책임지는 사람들에 대한 정당한 보상’과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체계 구축’을 포함해야 합니다. 부모가 아이와 함께할 수 있도록 일·가정 양립 제도를 강화하고, 일을 쉬는 동안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프랑스는 사회보험을 통해 부모의 자녀 돌봄을 금전적으로 보상하고 있습니다. 일정 기간 부모가 일을 쉬며 자녀를 돌볼 경우 양육수당, 휴직수당 등을 통해 부모의 자녀 돌봄이 생계 공백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합니다. 반면 우리나라의 아동수당은 10만원에 불과하고, 휴직수당은 소규모 자영업에는 적용되지 않아 일을 그만두고 아이를 돌볼 수 있는 여건을 만들기에 부족합니다.
정부의 아이돌봄 서비스는 여전히 규모가 작고 접근성도 낮습니다. 특히 긴급한 돌봄이 필요한 때에는 정보 부족과 신청 절차의 복잡성 때문에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영국의 ‘Sure Start’ 프로그램은 지역 단위로 운영되며, 모든 가정이 이용할 수 있도록 개방돼 있습니다. 저소득층일수록 더 많은 시간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고, 돌봄뿐 아니라 양육 상담과 취업 연계까지 통합적으로 지원합니다.
더는 홀로 남겨지는 아이가 없도록 새로운 안전망을 짜야 합니다. 돌봄의 사회화는 다음 세대를 키우는 책임을 분담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자녀를 돌볼 수 있도록 부모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돌봄이 오롯이 부모의 책임으로 지워진 사회는 그만큼 돌봄을 도외시하고 아이를 위험으로 내모는 사회입니다. 부모가 안심하고 일할 수 있어야 아이도 안전하게 자랄 수 있습니다. 돌봄은 누군가의 희생에 기대는 일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지켜야 할 가치입니다.
권희경 국립창원대교수 사회복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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