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방문했던 폴란드에서 두 개의 지하를 보았다. 하나는 전쟁을 지휘한 곳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 전쟁에 맞서다 스러진 곳이었다.
첫 번째는 히틀러가 총 800여일 동안 머물며 동부전선을 지휘했던 ‘늑대소굴’이다. 폴란드 북부 마주리아 숲 깊숙이 콘크리트 벙커 수십 채가 하나의 사령부를 이루고 있었다. 1944년 7월 20일, 이곳에서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회의 탁자 아래에 놓고 간 폭탄이 터졌다. 그런데 하필 그날 회의는 벙커가 아니라 통풍이 잘되는 목조 막사에서 열렸다. 폭발의 힘은 흩어졌고 히틀러는 살아남았다. 나치 독일에 대한 안으로부터의 저항은 그렇게 실패했다.
그로부터 12일 뒤, 바르샤바에서 또 다른 저항이 시작됐다. 런던 망명정부를 따르던 폴란드 국내군은 붉은군대가 곧 비스와강을 건너오리라 믿고 봉기했다. 소련의 지원을 기대하면서도, 그보다 먼저 수도를 해방해 전후 폴란드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승부였다. 그러나 소련군은 비스와강 동쪽에서 멈춰 섰다. 그 이유를 둘러싼 논쟁은 이어지지만, 스탈린에게 봉기군을 구하기 위해 서두를 이유는 크지 않았다. 국내군은 전후 폴란드에서 소련이 원하는 질서와 충돌할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소련은 적극적으로 봉기군을 구하지 않았고, 연합군 수송기의 소련 비행장 이용마저 한동안 막았다. 결국 폴란드 국내군은 고립된 채 63일을 싸운 끝에 항복했다. 약 20만명이 목숨을 잃었고, 대부분은 민간인이었다. 항복 뒤 독일군은 도시를 조직적으로 불태우고 폭파했다.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을 나오며 남은 질문은 그 용기가 어째서 그토록 무력하게 무너졌는가였다. 폴란드에는 익숙한 질문일 것이다. 이 나라는 18세기 말 세 차례에 걸쳐 강대국들에 분할당했고, 123년 동안 지도에서 사라졌다. 1918년 독립을 되찾았지만 1939년에는 독일과 소련에 차례로 침공당했다. 이듬해 카틴을 비롯한 처형지에서는 폴란드 장교와 지식인 2만여명이 소련의 총에 쓰러졌다. 제2차 세계대전 내내 수많은 폴란드인이 나치 독일에 맞서 싸웠지만, 전후 국경과 체제는 다시 강대국들이 결정했다. 전쟁에서 싸운 것은 폴란드인이었지만, 전후 질서를 결정한 것은 폴란드인이 아니었다.
오늘날 폴란드의 동쪽에서 다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폴란드는 과거와 다르다. 유럽의 주요 군사 강국으로 부상했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동부전선의 최전방이자 우크라이나 지원의 핵심 관문이 되었다.
그날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 앞에는 남녀노소가 뒤섞인 긴 줄이 서 있었다. 사람들은 승리를 기념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실패한 봉기와 파괴된 도시, 버림받았다는 기억을 되새기기 위해서였다. 폴란드가 기억하는 것은 영광보다 상처에 가깝다. 그러나 바로 그 상처의 기억이 오늘의 폴란드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다시는 자신의 운명을 다른 나라에 맡기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심호섭 육군사관학교 교수·군사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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