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의 행동과 인식 필요없이
완벽하게 타자적인 주변만 존재
나만의 소리에 몰입하기엔 최적
언뜻 보면 지하철은 음악을 듣기에 최악의 장소다. 이름 그대로 지하에서 달리는 열차인 만큼 굉음과 진동은 기본이다. 역에 들어설 때마다 금속이 부딪히는 거친 마찰음이 귀를 찌르고, 달리는 동안에도 바퀴가 레일을 긁는 둔탁한 소음이 멈추질 않는다. 내부에서도 소리는 끊이지 않는다. 출입문이 열리고 닫힐 때 ‘삐-익’하는 경고음, 이어지는 안내 방송, 이 모든 것이 지하철을 ‘소리의 잡화점’으로 만든다.
소리뿐만이 아니다. 옆에 서 있는 사람이 몸을 살짝 기대 오거나, 흔들리는 열차 안에서 누군가가 휘청이며 부딪히기도 한다. 서 있든 앉아 있든, 언제든 누군가와 접촉하게 되는 환경이다. 문이 열릴 때마다 차갑거나 더운 바람이 훅 들어오고, 사람들이 우르르 밀려들며 공간은 더 좁아진다. 특히 출퇴근 시간대에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지나가는 발걸음과 휙휙 스치는 몸짓들이 끊임없이 주변을 흔든다.

이 모든 조건을 고려하면, 지하철은 클래식 음악처럼 조용하고 섬세한 장르를 감상하기에 가장 불친절한 환경이다.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는 건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상황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나는 매일 아침 지하철에서 클래식 음악을 듣게 된다. 단순히 출근 시간을 때우기 위해 음악을 듣는 게 아니라, 놀랍게도 이 공간에서 가장 깊이 있게 음악에 몰입하게 된다. 지하철이라는 시끄럽고 복잡한 공간이, 나에게 가장 고요하고 밀폐된 감상의 시간을 허락하는 셈이다. 역설적이지만 나에겐 지하철이야말로 음악에 몰입하기 가장 좋은 장소다.
왜일까? 그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지하철이라는 공간은 겉보기엔 시끄럽고 산만해 보이지만 실은 내가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는 곳이다. 풍경도 없고 선택할 수 있는 자극도 별로 없다. 목적지를 바꿀 수도 없고 당장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도 없다. 눈앞에 스마트폰 화면 외엔 특별히 집중할 대상이 없고 그마저도 금세 지루해질 때가 많다. 말하자면 능동적으로 시간을 ‘관리’하거나 ‘조절’할 수 없는 폐쇄된 환경 속에 잠시 갇히는 셈이다.
의외로 그런 상태가 몰입에 가장 알맞은 환경을 만들어준다. 바깥은 소란스럽지만 내 안은 오히려 단순해진다. 그 안에서 점점 ‘듣는 일’에만 집중하게 된다.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청각이라는 감각 하나에 몰입할 수 있는 조건이 되어준다. 생각해 보면 집에서 음악을 들을 때는 늘 무언가가 끼어든다. 막 음악을 재생하고 첫 악장이 흐르기 시작하면 문득 ‘설거지를 아직 안 했지’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그러면 일어나야 한다. 음악은 멈춘다. 음악이 흐르는 동안 메일 확인을 하다 보면 어느새 음악은 배경으로만 깔린다.
지하철은 그런 의미에서 아이러니한 공간이다. 내 주변은 늘 움직이고 흔들리고 있지만 나는 오히려 가장 몰입한 상태로 그 안에 있게 된다. 좁고 분주한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일상의 복잡한 생각들로부터 잠시 벗어나 완전히 다른 세계에 들어가는 경험을 한다. 클래식 음악을 집중해서 듣기에 그만한 조건이 또 없다.
지하철이라는 공간이 음악 감상 공간으로 가능해진 데에는 기술의 힘도 크다.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 이 작은 장치는 나와 바깥 세계 사이에 얇지만 확실한 경계선을 그어준다. 열차 바퀴가 철로를 긁는 소리도, 옆 사람의 기침도, 매 역마다 들리는 안내 방송 음성도 대부분 사라진다. 그렇게 만들어진 고요 속에서 나는 어딘가 혼자 앉아 있는 듯한 감각을 느낀다. 심지어 노이즈 캔슬링 기능 덕에 이제는 아주 여린 소리인 피아니시모의 소리까지도 즐길 수 있다. 이전 같았으면 지하철 소음에 묻혀 흘려보냈을 법한 그 미세한 소리들이, 이제는 귀에 또렷이 들린다. 피아노의 건반이 천천히 내려앉는 순간의 압력, 첼리스트가 활을 천천히 밀어낼 때 생기는 마찰음, 관악기의 숨소리와 음의 여백까지, 그 모든 것이 낱낱이 들린다. 어쩌면 21세기의 콘서트홀은 의외로 지하 깊은 곳에 숨겨져 있었던 게 아닐까.
허명현 음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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