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7일 새벽, 임인철 원자력연구원 부원장이 보내온 미주리대 연구용 원자로(연구로) 홈페이지에 대문짝만 한 표제와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40년 전 캐나다 AECL 연구소 지역신문에 실렸던 하나로 기사가 뇌리를 스치며 가슴이 뭉클했다. 하나로 개발과 이번 미주리대 연구로 사업은 시대를 뛰어넘어 닮았다는 생각에서다.
발전용 원자로가 전력 생산을 위해 안전성과 경제성을 함께 갖춰야 하는 공급자 중심의 상품이라면, 연구로는 교육, 연구, 비파괴검사, 신물질 생산 등 다양한 요구를 최적으로 조합한 창작품이다. 따라서 개발 초기 공급자와 수요자가 함께하는 타당성 연구는 노형과 규모를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1960년 트리가 마크-Ⅱ(TRIGA MARK-Ⅱ) 도입 당시, 원자로라는 진귀하고 위험한 최신식 마술상자를 갖게 된다는 자부심에 모든 연구원이 벽돌 나르기도 마다하지 않았다. 당시 연구원이라야 문교부 지원으로 미국 아르곤연구소 원자력공학 단기과정을 수료한 젊은 연수생 30여명이 전부였고 원자로 전문가는 둘뿐이었다. 이들의 의욕과 노력에도 마크-Ⅲ로 이어진 트리가 시대는 기능적 한계에 부딪혀 결국 연구로 낭만주의 시대의 막을 내렸다. 하지만 당시 배출한 전문 인력은 우리나라 원자력산업 발전의 초석이 되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기술 자립과 안정적 핵연료 공급을 위해 원자력 기술의 국산화 필요성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캐나다 AECL이 월성 1·2호기 계약 및 열출력 40㎿(메가와트)급 재료시험로와 기술지원을 제안한 계기로 재료시험로 국산화가 추진됐다. 비록 복잡한 국내외 문제로 중단됐으나 이 과정에서 축적된 지식, 체계, 경험은 하나로 개발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특히 트리가형에서 불가능했던 고방사선 환경을 구현해 다목적 연구로의 길이 열리면서 연구로 실용주의 시대가 시작됐다.
1985년에 타당성 연구를 시작한 하나로 개발의 역사와 성과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당시 연구소는 중수로 핵연료 국산화와 경수로 기술 자립을 위한 대규모 프로젝트로 활기 넘치던 때라 불확실한 정부 예산 지원에 운명을 걸던 하나로 개발은 경영진에게 매력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설계부터 건설, 시운전의 전 주기를 책임지고 묵묵히 수행한 연구진의 노고와 헌신은 다시 평가받아야 한다. 특히 트리가부터 하나로에 이르기까지 연구로 프로젝트의 최전선에 섰던 고(故) 김동훈 박사의 업적을 기리며 그분의 영전에 이 글을 바친다.
그 이후로 우리는 국내외 연구로 건설 및 개조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왔다. 이번 미주리대 차세대 연구로 초기 설계를 맡으면서 연구로의 상업주의 시대가 열릴 것으로 기대한다. 보다 혁신적인 기술개발의 실험도구로서 연구로에 대한 수요가 늘고 기존 연구로의 출력 증강, 활용성 확장을 위한 개조 사업도 늘어날 것이다. 이는 분명 연구로 기술 강국인 우리에게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영국의 지성 체스터턴은 ‘영원한 인간’에서 자신을 깊은 산속 골짜기에 살다 모험을 찾아 떠나는 소년에 비유했다. 한참을 걷다 돌아보니 그동안 너무 가까이 있어 볼 수 없었던 자기 거처가 거대한 형상의 일부였음을 뒤늦게 깨달았다고 한다. 지금 필자의 심정이 그렇다.
오세기 전 한전국제원자력대학원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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