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수한파 악화일로 역성장 가능성
거야 탄핵 남발 대외신인도 흔들어
상생·협치의 정치 복원해 국란 막길
화불단행(禍不單行). 재앙은 홀로 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1997년이 그랬다. 그해 여름 서울을 떠난 대한항공 여객기가 괌 공항 인근 야산에 추락했다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탑승객 225명이 숨졌다. 나라 전체가 비통과 슬픔에 잠겼다. 3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경제가 거덜 났다. 해외투자은행에서 ‘아시아에 투자한 자금을 회수하라’(모건스탠리), ‘지금 당장 한국을 떠나라’(홍콩 페레그린 증권)는 섬뜩한 보고서가 나왔다. 한국경제의 파산을 알리는 조종이었다. 원·달러 환율은 연초 달러당 840원대에서 12월 말 1960원대로 치솟았다. 달러 곳간이 바닥나자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주식과 채권, 부동산 등 자산시장은 쑥대밭이 됐다. 대기업과 금융회사의 부도가 꼬리를 물었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위기는 형태를 달리하며 되풀이된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3일 밤 느닷없이 비상계엄을 선포해 대한민국을 공포와 혼돈의 늪에 빠트렸다. 계엄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전남 무안국제공항에서 제주항공 여객기가 착륙 도중 폭발하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여객기는 산산이 부서졌고 탑승객 179명이 사망했다. 27년 전처럼 재앙이 꼬리를 무는 형국이다.
비상계엄이 6시간에 그쳤지만 대통령에 이어 권한대행 국무총리까지 탄핵당하는 사상 초유의 정국혼란은 경제를 벼랑으로 몰고 있다. 당장 원·달러 환율은 한 달 새 70원 가까이 급등해 1470원대로 올라섰다. 연말 기준으로 외환위기 이후 가장 높다.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은 “환율상승의 절반은 정치적 불확실성 때문”이라고 했다. 글로벌 달러 강세로 불난 외환시장에 계엄·탄핵사태가 기름을 붓고 있다는 얘기다. 당국이 개입에 나섰지만 효과는 신통치 않다. ‘제2 환란’이 닥치는 게 아닌지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한국개발연구원조차 환율이 올 9월까지 1500원까지 오를 수 있다며 무리한 환율방어가 외환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내수침체도 악화일로다. 정국 혼란 속에 무안참사까지 더해지면서 소비심리는 더욱 얼어붙고 있다. 지난달 소비심리지수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가장 큰 폭으로 떨어졌다. 자영업자와 소상공인 사이에서는 IMF 외환위기 때보다 더 힘들다는 비명이 터져 나온다. 버팀목이던 수출도 증가세가 지난해 7월 13.9% 이후 4개월 만에 1%대로 떨어졌다. 지난해 4분기나 올해 1분기 역성장하고 연간 성장률도 1%대에 그칠 것이라는 비관론이 퍼진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거야의 탄핵폭주까지 화를 키운다. 한덕수 총리가 헌법재판소 재판관 임명을 보류하자 더불어민주당은 헌법에서 미처 예측하지 못한 권한대행 탄핵소추까지 결행했다. 대인신인도에 흠집을 내고 자본유출을 가속하는 위험천만한 자해극이다. 국제신용평가사인 무디스와 피치는 정치 갈등이 장기화할 경우 신용등급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민주당은 윤석열정부 들어 29건의 탄핵소추안을 발의했다. 대통령 탄핵을 제외하면 합당한 명분이나 법적 요건을 충족한 사례는 드물다. 이재명 대표의 사법처리를 막고 대선 가도의 걸림돌도 제거하겠다는 것 빼고는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정부가 멀쩡할 리 없고 국정도 구멍이 생길 수밖에 없다. 최 대행이 대통령, 총리, 경제부총리에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장까지 ‘1인 4역’을 맡는 판이다. 최 대행이 그제 헌재 재판관 후보자 3명 중 2명을 임명해 줄탄핵 위기는 잦아들었다. 그런데 여당이 “독단적 결정”이라며 날을 세웠고 대통령실 고위 참모진은 사의를 표명했다. 정국불안과 국정혼란은 좀처럼 끝날 기미가 없다.
대통령 파면이 결정되면 5∼6월 중 조기 대선이 치러진다. 여야 대립과 반목은 더 격화하고 포퓰리즘 공약도 기승을 부릴 게 틀림없다. 외환위기 때도 연말 대선이 있었다. 국가부도가 현실로 닥쳤는데도 김영삼정부는 레임덕에 빠졌고 여야도 정쟁으로 날을 샜다. 정치권의 사분오열과 진흙탕싸움은 국란을 부르거나 망국의 길을 재촉했던 게 과거의 경험이다. 여야는 상생과 공존의 정치를 복원해야 한다. 정치가 바로 서야 경제도 민생도 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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