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지 아버지가 김대중이라서 (장남 김홍일이) 두들겨 맞았다. 나 하나면 됐지, 차라리 나를 더 때리지….”(‘김대중 자서전’ 2권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자서전에서 이같이 회고했던 장남 김홍일 전 국회의원이 지난 20일 고문 후유증과 숙환으로 영면했다. 향년 71세. 군부독재와 맞서 싸웠던 여파로 오랫동안 병마와 싸워왔던 터라 정치권에선 그의 타계를 더욱 애달프게 여기는 분위기다. 굴곡진 인생 역정이 아버지와 똑 닮은 그는 김 전 대통령에게는 유독 ‘아픈 손가락’이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관인 민주평화당 최경환 의원은 21일 고인을 추억하며 “김 전 대통령의 믿음직한 맏아들이자 고난의 시절을 함께한 든든한 동지였다. 하늘나라에서 두 분이 만나 회한을 풀기 바란다”고 밝혔다.
해방 3년 뒤인 1948년 1월 전남 목포에서 태어난 김 전 의원은 정치인이 된 아버지의 길을 따라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다. 경희대 재학 시절인 1971년에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수감 생활을 했고 1980년에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돼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
이 때문에 50대 나이로 파킨슨병에 걸려 보행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신체적 고통에 시달렸다. 김 전 의원은 2001년 출간된 자서전에서 끔찍한 기억을 회고하며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의 아들은 당사자 입장에선 명예라기보다는 멍에요, 행복 쪽이라기보다는 불행 쪽”이라고 격정을 토로했다.
이희호 여사는 자서전을 통해 “고문 와중에 그 아이(김 전 의원)는 아버지의 혐의를 허위로 자백하지 않기 위해 자살시도까지 했다”고 적었다. 김 전 대통령은 김 전 의원이 자신 탓에 병을 얻었다고 안타까워했다.
동교동계 측근들에 따르면 김 전 대통령은 외부 일정을 마치고 동교동 자택으로 귀가하다가도 병석에 있는 아들이 걱정돼 서울 서교동의 김 전 의원 자택으로 발길을 돌린 적이 많았다고 한다.
‘김대중의 아들’이라는 후광을 업고도 순탄치 않았던 정계 생활 역시 ‘자갈밭 인생’의 연장이었다.
그는 1996년 15대 총선에서 목포·신안갑 국회의원으로 국회에 입성한 뒤 16·17대 국회에서 3선을 지냈다. 하지만 2006년 인사 청탁 대가로 1억5000만원을 받은 혐의가 인정돼 대법원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의원직을 상실했다.
김 전 의원은 이후 대외활동을 접었다. 수년 뒤 모습을 드러낸 건 2009년 김 전 대통령의 서거로 부친의 빈소에 나타나면서다. 당시 김 전 의원은 파킨슨병이 악화해 휠체어를 탄 채 등장했다. 대화도 어려운 상태였지만 장례 마지막 순간에는 “아버지!”라는 한 마디를 힘겹게 내뱉은 것으로 전해졌다.
김 전 의원의 장례는 나흘간 가족장으로 치러지며 김 전 의원측 관계자는 고인의 안장 문제에 대해 “광주 5·18 국립묘지에 모실 것”이라고 밝혔다. 보훈처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김 전 의원은) 5·18 민주유공자이므로 안장 대상자가 맞다. 다만, 안장심의위원회의 검토 결과는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정치권에선 민주화운동 시절 고문을 받고 ‘상흔’에 몸부림치는 전직 의원들이 재조명되고 있다. 김근태 전 민주당 상임고문은 1985년 서울대 민주화추진위 배후 조종 혐의로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가혹한 고문을 당했고, 한평생 후유증에 시달리다 2011년 패혈증으로 세상을 등졌다. 한명숙 전 총리, 이재오 자유한국당 상임고문 등도 고문 피해자로 알려져 있다.
안병수·박수찬 기자 rap@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