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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욕만 강조하는 아버지와
폭력적인 남자친구 옆에서
말할 자유를 빼앗긴 레베카
결국, 서툰 절도범이 되는데…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범죄자’ (‘올리브 키터리지’에 수록, 권상미 옮김, 문학동네)

종종 책에 관한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가장 인상적인 책은 무엇인가요? 작가가 되는 데 크게 영향을 끼친 책이 있다면? 작가가 되고 싶은데 꼭 읽어야 하는 책을 추천해준다면? 인생의 단 한 권의 책은? 하는 등의. 그런 질문에 대답하기가 좀 곤란하다. 돌아볼수록 좋고 배운 책이 너무 많아서. 지난 학기엔 해외 단편소설을 한편씩 읽고 토론했던 ‘세계문학 세미나’ 수업을 마치던 날, 한 학생이 웃으면서 이런 질문을 했다. 만약 집에 불이 나면 어떤 소설집을 챙겨 나가겠느냐는.

조경란 소설가

미국 문단의 거장이 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장편으로도, 연작 소설집으로도 읽을 수 있는 ‘올리브 키터리지’는 한 마을을 배경으로 여러 인물의 삶을 그물망처럼 연결해 보여준다. 아마도 작가의 이런 방식은 우리가 옆 사람이나 이웃에 대해 얼마나 잘 알지 못하는지를, 어떻게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지를 조명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열세 편의 이야기 중 내 마음에 가장 깊게 남는 단편은, “레베카 브라운은 평소에 물건을 훔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그날 아침에는 잡지를 한 권 훔쳤다”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범죄자’이다. 그러니까 레베카라는, 내내 무언가를 박탈당해 온 인물이.

그녀는 조합교회 목사의 딸이었다. 어머니는 꿈을 찾아 일찍 집을 나가버려서 아버지와 단둘이 쓸쓸한 집에서 성장했다. 허영은 죄악이라며 아버지는 집 안에 거울을 한 개만 달아두었고 식사 시간에 말을 하면 안 된다는 규칙을 만들어 두었다. 폭력적 성향이 드러나 보이는 지금의 남자친구는 그녀에게 늘 말이 많다고 주의 주는 통에 두통에 소화불량까지 생겼다. 병원 대기실에서 레베카는 마저 읽고 싶은 이야기가 실린 잡지를 한 권 훔쳤는데 거기서 셔츠 광고를 보곤 남자친구의 것을 주문하기 위해 전화를 건다. 다행히 상담사 여자는 친절하고 레베카 말에 귀 기울인다. 그녀 말을 주의 깊게, 끝까지 다 듣고 대답해주는 유일한 사람이 그 상담사 한 명밖에 없다.

상사가 불필요한 일을 시켰을 때도, 남자친구가 폭력적인 말을 일삼아도 레베카는 생각한다. 내게 싫다고 말할 권리가 있을까? 라고. 그렇게 배운 적이 없었고 그녀에게 그래도 된다고 말해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니까. 말하고 싶은 욕구와 충동은 언제나 눌러 담아야만 하는 줄 알았다. 말하고 싶어질 때마다 레베카는 빈 그릇을 마주하거나 라이터로 작은 종이들을 싱크대에서 태우곤 한다. “조그만 불꽃이 홱 일어나는 게” 좋아서. 상담사 여자에게 “전 세계 모든 사람을 위해 세계지도에 핀을 하나씩 꽂는다 해도 저를 위한 핀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편이거든요”라고 자신을 소개한 레베카는.

의사는 위에는 아무 문제가 없으며 좀 예민할 뿐이라고, 괜찮지 않다는 그녀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짜증까지 나 있다. 레베카는 그날은 병원에서 평범하고 밋밋한 작은 꽃병을 훔쳤다. 그래서 이제 그녀는 자기 자신을 “법적으로 따지자면 범죄자”라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건강이 나쁜 아버지에게 버터가 듬뿍 든 음식을 준 사람도, 대기실의 잡지와 작은 꽃병을 훔친 사람도 자신이라서. 독자는 안타까운 마음에 자꾸만 레베카에게 말을 건네고 싶어진다. 그렇지 않다고, 당신에게는 당신만의 권리가 있다고.

너무 늦긴 했지만, 이웃의 일로 레베카는 ‘권리’라는 말을 듣고 이해하게 되었다.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 싫다고 말할 권리, 자신을 버린 엄마로부터 온 오래된 엽서들을 불태워도 되는 권리, 의사에게 약이 효과가 없다고 말할 권리, 남자친구의 집을 걸어나갈 수 있는 권리. 그리고 작가는 이 서툰 범죄자 레베카 이야기에 ‘범죄자’라는 제목을 붙였다. 진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누구인가? 라고 묻는 듯한.

그때 지난학기 학생의 질문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범죄자’가 수록된 ‘올리브 키터리지’만은 챙겨갈 거라고. ‘범죄자’는 단편소설에서 중심인물, 보조인물, 공간, 사물, 욕망, 갈등, 결말이 어때야 하는지를 제시하고 배울 수 있는 소설이라고 여기기에, 오래도록 혼자만 알고 싶은 마음이 커서.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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