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위선양 의미 이젠 달라져
53년 된 제도, 공정 논란 계속
바뀐 시대에 맞게 손질 필요
1976년 7월31일 캐나다 몬트리올 모리스리처드 경기장. 레슬링 자유형 62㎏급 결승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양정모는 몽골의 제베긴 오이도프에게 8-10으로 판정패했다. 종료 휘슬과 함께 심판이 오이도프의 팔을 들어 올렸지만, 승자는 고개를 숙였고 패한 양정모는 환호했다. 당시 레슬링은 승패에 따라 벌점을 매겨 최종 순위를 정하는 방식이었다. 앞서 미국의 진 데이비스를 꺾었던 양정모는 벌점 합계에서 앞서면서 대한민국에 첫 올림픽 금메달을 안겼다.
한국은 말 그대로 들썩였다. 신문들은 호외를 찍어 금메달 소식을 전했고, 양정모가 금의환향한 8월3일 김포공항에서 서울시청까지 이어진 카퍼레이드 길가에는 약 100만명이 몰렸다고 한다. 한 선수의 금메달이 국가적 경사가 되던 시대였다.
양정모에게는 또다른 ‘최초’ 기록이 있다. 바로 체육인으로서 첫 병역특례라는 기록이다.
이 제도가 만들어진 것은 1973년. 정부는 ‘병역의무의 특례규제에 관한 법률’을 통해 예술·체육 특기자가 군 복무 대신 해당 분야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했다. 1972년 뮌헨올림픽에서 북한 리호준 선수가 사격에서 첫 금메달을 딴 이듬해였다.
국제무대에서 한국의 이름을 접할 기회 자체가 거의 없고, 남북 체제 경쟁이 스포츠에도 통용되던 시대였으니 뛰어난 선수가 군 복무로 전성기를 보내는 대신 국제대회에서 성과를 이어가는 것이 국가에도 이익이라는 ‘국위선양’의 논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첫 체육인 병역특례 이후 50년이 지난 2026년, 아이치 나고야 아시안게임에서도 수많은 병역특례자가 발생했다. 다만 이를 바라보는 여론의 온도는 예전과 달랐다.
논란의 중심에는 야구와 축구가 있었다. 단체 종목인 야구와 축구는 개인별 기여도를 가리기 어려운 데다가 억대의 프로선수가 많아 군 복무로 인한 경력 단절의 경제적 가치가 눈에 띄기 때문에 비판이 집중된다. 야구대표팀은 24명 가운데 병역 미필 선수가 16명에 달하면서 ‘미필 원정대’라는 비아냥까지 받았다. 결승 상대는 실업팀으로 구성된 일본. 이들에겐 병역 해결을 위한 가장 현실적인 국제대회가 아시안게임이었던 셈이다. 아시안게임이 합법적인 ‘병역 브로커’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축구에서는 대회 4연패 달성 후 일부 선수들이 “금메달보다 병역”이라고 언급하며 자축한 것이 반발을 불러왔다.
체육인 병역특례제도가 도입되던 당시 대한민국 국민이 ‘국위선양’을 할 수 있는 방법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한국 영화가 아카데미상을 받고, 한국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고, K드라마와 게임이 세계 시장에서 소비된다. 빌보드 앨범과 싱글차트에 수시로 이름을 오르내리는 방탄소년단(BTS)을 비롯해 K팝은 말할 것도 없다.
BTS와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가운데 누가 한국을 더 알렸는지를 비교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53년 전에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국위선양과 병역’의 연결고리를 지금도 같은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다. ‘국기에 대한 맹세’도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라는 대목이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로 바뀐 지 오래다. 올림픽 금메달을 땄다고 카퍼레이드를 하던 시절도 지났다. 북한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메달 하나에 목숨을 걸고 법이 만들어진 1973년과, 온갖 상품과 예술작품에 ‘K’가 자연스레 따라붙는 2026년은 완전히 다른 시대라는 얘기다.
‘국위선양’에 가려졌지만 병역특례에는 선수 경력 보호라는 현실적 이유도 있었다. 전성기가 짧은 선수에게 1년 넘는 공백은 경기력과 선수 생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고, 특히 프로리그나 거액 연봉과 거리가 먼 비인기 종목에서는 국제대회 성적이 선수 개인의 생계와 실업팀 유지, 종목의 존립에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이제 이 제도가 선수 경력 보호용인지, 국제대회 성적 보상용인지, ‘국위선양’에 대한 대가인지를 돌아볼 때가 됐다. 일괄적 아시안게임 병역특례가 그 시대적 소명을 다했고, 이제는 자유롭고 정의로운 시대에 맞는 제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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