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원 배지가 ‘청탁 통행증’된 韓 국회
金 후보자 임상승인 거래 의혹 파문
청탁금지법 ‘의원 특권’ 줄이는 계기로
2008년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로 나섰던 존 매케인은 연방 상원의원 시절이던 1987년 동료 의원 네 명과 함께 금융감독기관의 저축대부조합 부실 대출 관행에 대한 검사를 중단시키려 압력을 행사했다. 앞서 대부조합의 소유주 찰스 키팅은 이 의원들에게 후원금을 기부했다. 이 대부조합은 2년 가까이 더 영업하다 파산했고, 그사이 부실 자산은 크게 불었다. 납세자들의 손실이 그만큼 커졌다. 매케인은 훗날 ‘키팅 파이브(Keating Five)’ 사건으로 알려진 이 스캔들을 정치 인생의 오점으로 여기고 부끄러워했다.
미 연방 상원윤리위에서 매케인 등은 “지역구 기업을 위해 어느 의원이라도 그랬을 것”이라고 항변했다. 하지만 상원윤리위는 “지역구 민원이라 하더라도 정치자금 모금과 연결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질책했다. 그 이상의 중징계는 어려웠다. 의원의 ‘민원’을 어느 선까지 허용할 것이냐에 대한 기준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상원 규칙 43조가 만들어진 배경이다. 규칙 43조는 ‘의원이 공무원과 기관을 상대로 민원인을 도울 수 있지만, 해당 의원에 대한 기부나 서비스, 혹은 그런 약속에 근거해 결정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했다.
스캔들을 다루는 미 상원의 자세는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김승원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코로나 신약 임상시험 청탁’ 의혹은 여러 면에서 부적절했다. 김 후보자는 제약사 제넨셀의 신약 임상시험이 신속히 이뤄질 수 있도록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장에게 요청한 것이 ‘공익적 고충 민원’이었다고 해명했다. 당시는 코로나 창궐기였다. 국회의원이 국산 코로나 치료제 개발을 위해 빠른 심사를 요구할 수는 있다고 본다. 현재까지는 식약처 심사가 김 후보자의 민원으로 왜곡됐다는 증거는 없다.
그런데 한동훈 의원이 공개한 김 후보자와 브로커 양모씨, 제넨셀 대표 강모씨의 통화 녹취록을 보면 의구심이 생긴다. 김 후보자는 오빠·동생 관계인 양씨와의 통화에서 식약처의 임상시험 승인이 나면 제넨셀이 수천억원을 벌 수도 있다는 말을 했다. 김 후보자와 양씨 사이에서는 후원금 얘기도 오갔다. 제넨셀 임상시험 승인 건은 다른 치료제보다 빨리 처리된 것으로 나타났다. 김 후보자와 알고 지낸 정모 판사는 강씨의 구속영장을 두 차례나 기각했고, 세 사람이 만나 활짝 웃으며 찍은 사진도 나왔다. ‘공익적 고충 민원’이란 말이 무색할 지경이다.
미국 의회였다면 김 후보자의 민원은 윤리위 조사 대상이 됐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국회의원을 포함한 공직자를 규율하는 청탁금지법이 있긴 하다. 그런데 국회는 ‘선출직 공직자와 정당, 시민단체 등이 공익적 목적으로 제3자의 고충 민원을 전달하는 행위’를 청탁금지 대상의 예외로 뒀다. 김 후보자가 줄곧 ‘공익적 고충 민원’이라고 강변하는 이유일 것이다. 이 조항의 맹점은 무엇이 공익적 목적인지를 판단하는 주체가 없다는 점이다. 국회의원 앞에서 고양이 앞의 쥐 신세인 식약처장이 의원의 연락을 단순 문의로만 받아들였을까. 다른 공직자는 5만원짜리 선물도 조심하며 사는데 공직자의 갑(甲)인 의원은 청탁금지법의 사각지대에서 활보한다. 청탁금지법 예외 조항이 ‘국회의원 특권 조항’으로 변질됐다.
검찰 수사팀은 김 후보자가 임상시험 승인 청탁 대가로 후원금 500만원을 받기로 약속(알선뇌물약속 혐의)했다고 보고 윗선에 기소 의견을 냈으나, 종국엔 기소가 유예됐다. 강씨 사건을 다룬 법원은 김 후보자의 민원이 다른 업체보다 우선 검토해 달라는 취지의 부정한 청탁은 아니었다고 판단했다. 의원 연줄이 없는 다른 제약사 대표가 식약처에 제넨셀과 같은 민원을 했어도 같은 결과가 나왔을까. ‘공익’과 ‘공정’이라는 말이 이렇게 오염되고 있다.
오늘 김 후보자 인사청문회가 열린다. 여야는 김 후보자의 청탁 의혹 사안을 정치공방 소재로 소비해선 안 된다. 미국 상원은 키팅 파이브 사건을 계기로 자신들을 제약하는 규칙을 만들었다. 우리도 이번 파문을 청탁금지법 예외 조항 개정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전화 한 통으로 예산과 인사, 인허가, 수사 등을 좌지우지하고 뒤로 후원금을 받아 챙기는 데는 여야가 따로 없다. 의원들은 ‘청탁 통행증’을 스스로 반납해야 한다.
조남규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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