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관 공백 장기화에 대법원 재제청 절차 밟을 듯
與 ‘추천위’ 법 개정 추진 속에 靑 새 후보도 반려 가능성
법조계·野 “재제청 요구, 국회의 임명동의 권한까지 침해”
청와대가 28일 헌정사상 최초로 대법원장의 대법관 후보자 제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재제청을 요청했다. 법조계에선 대법원이 대법관 장기 공백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곧 후보자 추천위원회를 다시 꾸리고 재제청 절차를 밟을 수밖에 없을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다만 여권이 대법관 후보를 추천할 때마다 추천위를 구성하도록 한 법 조항을 ‘꼼수’라며 개정을 추진하는 상황에서 청와대가 ‘재반려’ 카드로 맞설 가능성도 크다. 어느 쪽이든 대법관 공백 장기화는 불가피한 상황에서, 청와대의 재제청 요청은 국회가 대법관 후보에 대한 임명 동의 여부를 결정할 권한까지 침해해 위헌이란 비판도 제기된다.
◆대법원 측 “재제청 요청 검토 중”
강유정 청와대 수석대변인은 이날 오후 춘추관 브리핑에서 “손봉기 후보자에 대해 현재 상태로 국회에 임명 동의안을 제출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으므로, 대법원장에게 다시 제청할 것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조 대법원장이 18일 노태악 전 대법관 후임으로 손봉기 대구지법 부장판사를 이재명 대통령에게 서면으로 제청한 지 열흘 만이다.
여권을 중심으로 조 대법원장이 대통령의 임명권을 무시했다는 반발이 거셌는데, 이날 청와대 역시 “절차적 완결성을 충분히 갖추지 못했다”며 사실상 조 대법원장의 제청을 반려한 것이다.
대통령이 대법원의 대법관 후보 제청을 반려한 것은 헌정사상 최초다. 2012년 김병화 대법관 후보자가 인사청문 과정에서 사퇴한 뒤 후보추천위를 다시 꾸린 사례는 있으나 대통령이 대법원장의 제청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아 재제청으로 이어진 전례는 없다.
대법원은 이날 청와대 발표 이후 별다른 입장을 내지 않고 있다. 대법원 관계자는 “청와대의 재제청 요청에 대해 검토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법조계에선 대법원의 숙고가 길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다음달 초 이흥구 대법관의 퇴임과 함께 ‘대법관 2명’ 공석이 임박한 상황에서 새 후보 추천 절차에 들어갈 것이란 분석이다.
◆‘반려→재제청→재반려’ 핑퐁 반복 우려
대법원이 ‘재제청 요청’을 받아들이면 대법관 인선은 사실상 원점으로 돌아간다.
현행 법원조직법 41조의2에 따르면 대법관후보추천위는 대법원장이 대법관 후보자를 제청할 때마다 구성되고, 추천위가 후보자를 대법원장에게 추천하면 추천위는 해산된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새 후보를 제청하기 위해 후보자 천거와 추천위 구성, 심사 절차가 다시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권이 해당 법 조항이 ‘꼼수’라며 개정을 추진하는 상황이 향후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기존에 추천된 나머지 3명(윤성식 서울고법 부장판사, 박순영 서울고법 고법판사, 김민기 수원고법 고법판사) 중 1명을 다시 제청하면 된다는 게 여권의 주장인데, 청와대도 기존 추천을 존중해 재제청하라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만일 여권의 주장에 따라 나머지 세 후보 중 재제청해야 한다면 대통령이 원하는 후보로 제청될 때까지 ‘반려→재제청→재반려’라는 ‘핑퐁’이 지속될 가능성이 크고, 이는 사실상 대법원장의 제청권을 무력화하는 것이란 비판이 나온다.
여기에 윤성식 부장판사가 현재 내란전담재판부 재판장을 맡고 있는 점, 박순영 고법판사는 중앙선관위원으로서 투표용지 부족 사태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점에서, 사실상 남은 후보는 청와대가 선호해 온 김민기 고법판사뿐인 것도 대법원으로선 우려스러운 지점이다. 조 대법원장은 오영준 헌법재판관이 배우자인 점을 우려해 김 고법판사는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만일 조 대법원장이 청와대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새 후보자 천거를 거쳐 후보추천위원회를 재구성할 경우, 청와대와의 갈등의 골은 깊어질 전망이다.
◆“국회 의결도 안 부쳐보고 재제청 요구는 삼권분립 형해화”
법조계에선 청와대의 재제청 요구가 헌법상 보장된 대법원장의 대법관 제청권 침해이자 나아가 삼권분립 원칙을 형해화한 것이란 지적이 나왔다.
전직 고위 법관은 “대통령의 임명권 행사는 대통령 고유의 권한으로 존중받아야 한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누가 봐도 대통령이 ‘제청된 후보가 내 마음에 안 들면 끝까지 재제청 요구를 하겠다’고 버티는 형국”이라며 “국회가 청문회를 거쳐 임명동의안 제청을 동의하지 않았으므로 임명하지 않겠다는 것이면 몰라도, 대법원의 제청안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헌법상 대법관 임명 조항이 정한 삼권분립에 어긋나는 측면이 분명히 있다”고 강조했다.
헌법 104조 2항에 따르면 대법관 임명 절차에서 대법원장, 대통령, 국회 세 기관은 모두 실질적 권한을 지닌다. 대법원장이 대통령에게 대법관 후보를 선정해 임명을 제청하면, 대통령이 국회에 임명동의안을 제출한다. 이후 국회가 인사청문회를 거쳐 임명동의안을 통과시키면 대통령이 임명한다.
헌법재판소가 지난해 2월 헌법재판관 미임명 관련 ‘국회-대통령 간 권한쟁의심판’ 사건 선고에서 밝힌 “대통령의 헌법재판관 임명권은 권한인 동시에 헌법상 의무”라는 법리를 대법관 임명에도 확장한다면, 청와대의 재제청 요구는 헌법상 의무를 저버린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헌재는 이 사건에서 한 전 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 당시 마은혁 재판관 후보자를 임명하지 않은 것은 헌법상 의무를 저버린 것이며 헌법이 부여한 국회의 헌재 구성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결정했다.
야권에선 즉각 “대통령이 제청 후보자에 대한 임명 절차를 진행하지 않는 것은 위헌”이란 비판이 제기됐다.
무소속 한동훈 의원은 이날 페이스북에 “오늘 헌법재판관을 미임명한 한덕수 전 국무총리에 대해 징역 5년이 구형됐는데, 같은 날 이 대통령은 대법원장이 제청한 손봉기 대법관 후보자를 헌법에 따라 국회로 보내지 않고 거부했다”며 “같은 논리에 따라 최소 징역 5년 아니냐”고 반문했다.
이어 한 의원은 “국회의원은 대법원장이 제청한 손봉기 후보자에 대해 동의 여부를 정할 헌법적 책무와 권한이 있다. 그런데 이재명 대통령의 거부로 인해 손 후보자에 대한 동의여부를 심의할 헌법적 책무와 권한이 침해당했다”며 “야권의 국회의원들이 모두 함께 뜻을 모아 이 대통령의 손봉기 대법관 후보자 제청 반려의 위헌성을 확인하기 위해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할 것을 제안한다”고 했다.
◆어느 쪽이든 대법관 1명 공석 장기화는 불가피
공이 대법원으로 넘어 온 상황에서 조 대법원장이 어느 쪽을 선택하든 대법관 장기 공백은 피하기 어려워졌다. 노태악 전 대법관이 3월 후임자 없이 퇴임한 이후 6개월 가까이 대법관 1명이 공백인 상황이다.
다만 청와대가 다음달 7일 퇴임하는 이흥구 대법관 후임으로 제청된 김성수 서울고법 부장판사에 대해선 국회에 임명 동의안을 보내기로 하며 ‘2명 공백’이 장기화하는 상황은 피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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