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사회적책임 넘어 이미지 개선
2025년 728개사 지원액 2000억 육박
호암미술관·LG아트센터·SK 선혜원
공연장·미술관 등 인프라 운영 앞장
예술인재 육성하고 지역 문화행사도
경영 상황 따라 후원액 축소 리스크
“정부, 세액공제 등 정책 지원 검토를”
프랑스 파리의 불로뉴 숲에 자리 잡은 루이비통 재단 미술관은 세계적인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압도적인 외관으로 매년 수백만명의 관람객을 끌어모은다. 앤디 워홀, 바스키아 등 현대미술 거장들의 전시를 기획하며 루이비통은 단순한 소비재 기업을 넘어 거대한 ‘문화 권력’으로 자리매김했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프라다 재단 역시 독립영화 상영, 건축 프로젝트, 철학 아카데미 등 폭넓은 다원 예술을 전폭적으로 후원한다.
글로벌 명품 브랜드들이 이처럼 일회성 광고 대신 천문학적인 비용을 문화예술에 쏟아붓는 이유는 명확하다. 소비 시장의 핵심축이 감성적 가치와 문화적 경험 중심으로 이동하면서 예술과의 결합이 대체 불가능한 브랜드 프리미엄을 구축하는 데 매우 유용하기 때문이다.
기업들의 메세나(mecenat·문화예술 지원) 흐름은 한국 산업계에도 뿌리내리고 있다. 9일 한국메세나협회의 ‘2025년도 기업의 문화예술 지원 현황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기업의 문화예술 지원 총액은 약 1968억7900만원으로 집계됐다. 지원 참여 기업(728개사)은 전년 대비 24%, 지원 건수(2392건)는 28.5% 늘어나며 메세나 생태계에 진입한 기업의 저변이 갈수록 넓어지는 양상이다.
◆사회 공헌에다 브랜드 인지도까지 상승
기업들은 메세나 활동으로 예술과 상호작용하며 긍정적인 시너지를 내고 있다. 특히 문화예술 지원을 단순 사회적 책임 이행을 넘어 브랜드 인지도 제고와 이미지 구축을 위한 전략적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는 추세다.
지난해 기업들이 실제 진행한 문화예술 지원 사업의 목적을 분류한 결과 사회공헌 전략이 55.6%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이어 마케팅 전략(29.9%), 기업문화 전략(14.5%) 순이었다. 전년 대비로는 사회공헌 전략 비중이 6.8%포인트 감소했고, 마케팅 전략 비중은 8.3%포인트 늘었다. 이는 기업들이 문화예술 지원을 고객 경험 확장과 주요 고객 대상 마케팅 등 실질적인 경영 성과와 직결되는 핵심 마케팅 수단으로 중시하기 시작했음을 시사한다.
실제 예산 집행 경로에서도 기존의 사회공헌비(43.5%)에 이어 마케팅비(홍보비 포함) 비중이 23.4%에 달했다. 메세나 활동이 단발성 기부를 넘어 기업 경영의 한 축으로 자리 잡았음도 확인된다. 응답 기업의 97.1%는 문화예술 지원 사업 계획의 전체나 일부를 사전에 수립한다고 답해 대부분의 메세나 활동이 체계적인 계획에 따라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예술 인프라 구축과 예술인 지원 등 활발
메세나 활동을 이끄는 축은 크게 기업이 출연한 전문 문화재단과 개별 일반 기업 단위의 직접 지원으로 나뉘며, 최근에는 산업군의 경계마저 허물어지고 있다.
전통적으로 기업 출연 문화재단들은 대규모 자본이 필요한 문화 거점 확충과 장기 프로젝트를 주도하며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해왔다. 이번 조사에서도 전체 지원금 중 공연장, 미술관, 복합문화공간 등 인프라 운영 지원이 1106억6700만원(56.2%)으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삼성은 삼성문화재단을 통해 ‘리움미술관’과 ‘호암미술관’을 운영하며 작품 수집과 보존, 연구, 전시, 교육을 포괄하는 민간 미술 인프라를 구축해왔다. LG연암문화재단은 ‘LG아트센터 서울’을 거점으로 국내외 우수 공연을 소개하고, ‘LG 아트클래스’와 ‘LG융합예술영재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인재 육성에 기여하고 있다. 현대차 정몽구 재단은 음악·무용·국악 분야 장학사업을 통해 미래 인재를 발굴하고, ‘계촌 클래식 축제’로 지역사회와 예술을 연결한다.
과거 제조업 중심이었던 메세나 저변은 유통·금융업계 전반으로 확산 중이다. 지난해 개별 기업 중 가장 큰 지원 규모를 기록한 현대백화점은 ‘알트원(ALT.1) 뮤지엄’, ‘갤러리H’, ‘현대어린이책미술관’ 등에서 전시·공연·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시민들의 문화 접근성을 높였다. 2위인 KT&G는 서울·춘천·논산·부산에서 복합 문화예술 공간 ‘KT&G상상마당’을 운영하고, 3위 신한은행은 다양한 기관과의 협력으로 지역 문화 생태계 조성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지역 문화 격차 해소에도 기여
메세나 활동의 진화는 수도권에 쏠려 있던 자본을 비수도권으로 분산시키는 성과도 낳았다. 이번 조사에서 수도권 중심의 지원 비중은 전년 대비 3.2%포인트 감소(61.1%→57.9%)한 반면, 비수도권 지역 지원 비중은 6.9%포인트 증가(28%→34.9%)했다.
포스코그룹은 무료 관람이 가능한 서울 사옥 내 포스코미술관 운영과 더불어 포항·광양에 철강 조형물 등 랜드마크를 조성해 지역 주민 등 이용객들에게 호평을 얻고 있다. 2019년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협연으로 시작된 ‘포스코 클래식’은 지난해 서울·포항·광양에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의 협연 무대를 선보였다. HD현대중공업은 복합문화예술시설 ‘HD아트센터’를 운영하며 울산 시민의 문화 향유 기회를 확대하고 있다. GS칼텍스도 전남 여수에서 복합문화예술공간 ‘예울마루’를 통해 공연과 전시,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다만 기업들의 문화예술 지원 활동이 양적으로 증가한 데 비해 전체 지원 금액의 성장세가 꺾인 건 아쉬운 대목이다. 지원 금액은 2022년(2073억4400만원) 이후 계속 늘다 지난해 전년 대비 7.4% 줄면서 1900억원대로 떨어졌다. 한 예술경영 전문가는 “오너의 관심이나 기업 브랜딩이라는 뚜렷한 목적이 없는 사회공헌 성격의 문화예술 지원은 경기가 어려워지면 우선순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기업 오너의 니즈와 사회공헌 목적을 결합할 수 있는 재단이나 아트펀드 같은 집합투자체를 활성화해야 기업의 예술 후원 활동을 안정적으로 확대해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제도적 기반과 환경 마련을 위한 정부의 노력도 필요하다. 세액공제 등 경기 변동에 따른 후원 축소 위험을 완화하기 위한 정책적 지원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다. 한국메세나협회 관계자는 “기업은 단기 후원 방식에서 나아가 중장기적 파트너십을 기반으로 한 전략적 지원 체계를 강화하고, 예술계도 기업과 협업할 수 있는 기획 능력과 사업 모델을 키워야 한다”며 “기업, 예술계, 정부의 협력과 공동의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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