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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모의 한국인 탈무드] 충선왕은 왜 세종이 되지 못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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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조언도 실행에 옮기지 않으면 허사
지도자가 지켜야 할 현장 떠나는 순간 비극

“선비들을 모아 옛 국가의 흥망과 군신 간의 잘잘못을 논평할 때마다 부지런히 탐구하여 조금도 게으름이 없었다.” 고려의 충선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 사관이 내린 평가다. 그는 “어진 이를 좋아하고 악한 이를 미워했으며, 총명하고 기억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훗날 조선의 세종대왕을 떠올리게 한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임금의 자리는 온 백성이 우러러보고 모든 정무가 집중되는 곳이어서 단 하루도 비워서는 안 된다. 그런데도 왕은 황제의 명으로 복위한 뒤 여자와 내시들에게 미혹되어 5년이나 연경(燕京: 베이징)에 머물렀다.” 학문을 좋아하고 개혁의 뜻도 품었지만, 정작 국왕이 있어야 할 정치의 현장을 떠났다는 비판이다.

박현모 세종국가경영연구원 원장
박현모 세종국가경영연구원 원장

충선왕의 삶과 죽음은 한 편의 영화로 만들어도 충분할 만큼 파란만장했다. 부왕이 살아 있는 가운데 스물네 살에 즉위했으나 불과 8개월 만에 폐위되었고, 10년 뒤에 다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고려를 떠나 원나라에 머물면서 전지(傳旨)만으로 국정을 처리하는 ‘원격정치’에 의존했다. 그마저도 5년 만에 아들에게 왕위를 넘겼다. 이후 원나라 중앙정치에 뛰어들었다가 환관의 견제를 받아 티베트 지역까지 유배되었다. 이제현을 비롯한 고려 지식인들의 노력으로 풀려났지만, 끝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원나라에서 생을 마쳤다.

충선왕 시대 고려 조정의 특징은 극심한 분열과 배제, 그리고 참소정치였다. 왕위가 아버지 충렬왕과 아들 충선왕 사이를 오가면서 어느 편에 서느냐가 출세와 부귀를 좌우했다. 원나라 조정에서 언제 어떤 바람이 불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집권세력은 자기 사람을 요직에 앉히고 재산을 불리는 데 혈안이 되었다. 이른바 ‘흑책정사’였다. 여기에 방해되는 사람은 누구든 배척했다.

반대세력 역시 다르지 않았다. 상대의 정통성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은 채 원나라 조정만을 섬기며 “국내에 사달이 나기만을” 기다렸다. 고려의 국격이나 백성의 삶은 안중에도 없었다. 원 황제의 환심을 사거나 참소로 상대를 권좌에서 끌어내리면 그만이었다. ‘참을 수 없는 왕위의 가벼움’, 곧 잦은 왕위 교체가 민심을 흔들고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사실은 이 시대가 남긴 뼈아픈 교훈이다.

그런데 이처럼 주권이 크게 제약된 혼미한 시대에도 새로운 변화는 싹트고 있었다. 폐위된 충선왕이 원나라에 세운 만권당(萬卷堂)을 통해 성리학이라는 ‘오래된 신사상’이 고려에 본격적으로 들어왔다. 송나라에서 꽃피었으나 정작 그 송을 멸망시킨 원나라에서 새롭게 수용된 이 사상은 이제현을 비롯한 고려 지식인들에게 강렬한 구세의식을 불러일으켰다. “배운 이는 천하의 근심을 먼저 근심하고, 천하의 즐거움을 나중에 즐긴다.” 송나라 범중엄이 제시한 선우후락(先憂後樂) 정신은 이제현과 이색을 거쳐 정도전 등 신흥 유학자들에게 이어졌다. 이들은 현실을 개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무너진 질서 너머의 ‘다음 시대’를 준비했다. 정치에서 좌절한 충선왕이 학문으로 뿌린 씨앗이 훗날 새 왕조를 세우는 사상적 토대로 자라난 셈이다.

그렇다면 충선왕은 왜 세종의 길을 걷지 못했을까. 나는 이 글의 첫머리에 인용한 사관의 평가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그는 어진 이들과 만나 토론하기를 즐겼지만, 그 과정에서 얻은 지혜를 정책으로 옮겨 끝까지 실천하지 못했다. 악을 미워하면서도 악한 자를 단호히 내치지 못했다. 그 결과 정치는 더욱 혼란해졌고, 자신도 점차 피폐해져 끝내 좌절하고 말았다.

세종은 “하루가 늦어지면 열흘이 늦어지고, 열흘이 늦어지면 한 해가 늦어진다”고 말했다. 아무리 훌륭한 조언을 듣고 뛰어난 생각을 품더라도 실행에 옮기지 않으면 세상을 바꿀 수 없다. 배운 바를 실천하지 못하고 지도자가 지켜야 할 현장을 떠나는 순간, 충선왕의 비극은 언제든 되풀이될 수 있다.

 

박현모 세종국가경영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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