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장 밑에는 부의장, 국무총리 밑에는 부총리가 있어 각각 필요한 경우 상급자의 직무를 대리한다. 그런데 삼권분립의 한 축인 대법원에는 대법원장만 존재할 뿐 부원장은 없다. 사법부 수장이 공석인 경우 대법관들 중 서열이 가장 높은 선임자가 대법원장 권한을 대행한다. 다만 평상시에는 선임 대법관 말고 법원행정처장을 겸임하는 대법관이 대법원장에 이은 대법원의 ‘2인자’ 노릇을 한다. 언론에서 종종 법원행정처장을 ‘부(副)대법원장’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제로 역대 대법원장 가운데 김용철(1986∼1988년 재임)과 최종영(1999∼2005년 재임)이 법원행정처장을 거쳤다. 이강국 전 헌법재판소장(2007∼2013년 재임)과 김상환 현 헌재소장도 대법관 시절 법원행정처장을 지냈다.
노무현정부 시절인 2005년 대법관의 법원행정처장 겸임 제도가 폐지됐다. 재임 기간 재판에 관여하지 않는 법원행정처장이 대법관 직함까지 달고 있는 것은 부당하다는 판단에 따른 조치였다. 그에 따라 행정 관료처럼 오로지 사법행정만 총괄하는 법원행정처장이 출현했다. 하지만 불과 2년 만인 2007년 대법관이 법원행정처장을 맡는 옛 시스템으로 되돌아갔다. 결과적으로 대법관 한 자리가 줄어든 데 따른 불만이 컸던 듯하다. 대법관이 아닌 법원행정처장은 행정부 및 입법부를 상대함에 있어서 예전처럼 대법관을 겸하는 법원행정처장과 달리 위세가 영 딸리고 말빨도 잘 안 먹힌다는 현실적 이유 또한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법원행정처장은 정해진 임기가 없다. 대법원장에 의해 법원행정처장으로 발탁되면 통상 2∼3년 사법행정 업무에만 매진하다가 재판 현장으로 복귀하는 것이 관례다. 그런데 양승태 대법원장(2011∼2017년 재임) 시절 이른바 ‘상고법원’ 관련 부당 거래 의혹이 불거지며 법원행정처에 풍랑이 몰아쳤다. 박근혜정부 당시 양 대법원장이 상고법원 신설을 목표로 행정부에 로비를 벌이는 과정에서 판결 왜곡 등 부적절한 일이 저질러졌다는 것인데, 실제 로비를 맡은 법원행정처장 및 법원행정처 간부들에게 불똥이 튀었다. 문재인정부 출범 후 검찰이 수사를 벼르는 가운데 당시 법원행정처장은 취임 1년3개월 만에 그만뒀다. 그 후임자도 고작 6개월 만에 물러났다. 사법부 심장을 겨냥한 검찰 수사의 칼끝이 매서웠다.
지난 2월27일 박영재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이 조희대 대법원장에게 사의를 표했다. 올해 1월16일 취임 후 불과 42일 만이다. 여당이자 국회 과반 다수당인 더불어민주당이 대법관 정원을 현행 14명에서 26명으로 늘리는 대법관 증원법(법원조직법 개정안), 대법원 확정 판결도 헌법소원 대상으로 삼는 재판소원제(헌법재판소법 개정안),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법률을 그릇되게 적용한 판·검사를 처벌하는 법왜곡죄(형법 개정안) 등 이른바 ‘사법 3법’을 강행 처리한 데 따른 항의 표시로 풀이된다. 입법부가 대법원 의견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 상황에서 대법관 중 어느 누구도 법원행정처장을 겸하고 싶지 않을 듯하다. 민주당이 법원행정처 폐지까지 검토하는 가운데 어쩌면 박 처장이 사법부 역사상 마지막 법원행정처장으로 기록될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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