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존엄 훼손 땐 어떤 사상도 실패
보수, ‘혐오 발언 방지법’ 입법 나서고
진보, 국군·납북·억류자 송환 앞장을
조정래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 ‘태백산맥’ 결말 부분의 대사다. “당신들은 실패했소. 아주 철저히 말이요. … 사람들을 수단으로 삼고, 사람 간의 증오에 토대하는 한 그 어떤 사상도 사람들을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전세 역전에 궁지로 몰린 좌익이 후퇴에 앞서 주민을 학살하자 지식인 김범우(안성기 분)가 전남 보성군당위원장 염상진(김명곤 분)에게 한 말이다.
2016년 망명한 태영호는 2017년 1월 인터뷰 때 탈북 배경을 묻는 말에 이 장면을 떠올렸다. 1990년대 말 덴마크 TV에 방영된 영화를 보며 체제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기사를 정리하면서 “역사의 아이러니다. 우파 진영 일각에서 좌파 문예 작품으로 낙인찍은 ‘태백산맥’이 엘리트 북한 외교관의 탈북을 이끄는 동인(動因)이었다니. 좌니, 우니 하는 말이 인간의 운명 앞에 얼마나 허명(虛名)인가”라고 썼다. 그는 자서전(‘3층 서기실의 암호’)에서도 이 대목을 거론하면서 “처음에는 용공 영화인지 반공 영화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고도 했다.
보수니 진보니, 좌니 우니, 반공이니 용공이니 하는 사상·이념의 기준을 적용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이슈가 많다. 12·3 당시 홍장원의 행보도 보혁, 좌우로만 보려는 자들에겐 난해할 것이다. 우원식·한동훈·이재명 등에 대한 체포 지시 묵살과 관련, “집에 가서 편안하게 가족들하고 저녁 식사하고 TV 보는데 방첩사 수사관과 국정원 조사관들이 뛰어들어서 수갑 채워서 벙커에 넣었다? 대한민국이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냐”는 울분에 고개를 끄덕인다. 진영 논리를 뛰어넘는 ‘법치, 민주주의 대한민국’이 사고, 행동의 준거였던 것이다.
우리의 인권, 인도(人道) 문제 논의는 천박하고 혼란스럽다. 보혁·좌우 모두 겉으로는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개별 이슈엔 극한 입장차다. 이재명 대통령의 금시초문 발언에 세상이 놀란 북한 억류 국민 등 북한 인권 문제가 대표적이다. 공개 처형, 강제 실종, 정치범 수용소 수감 등 북한 당국의 반인도적 범죄는 물론 국군포로, 납북 피해자, 억류 국민에 대해 진보 진영이 너무 무신경하다고 하면 기분 나쁘겠는가. 이주노동자 지게차 결박 사건 때 “야만적 인권 침해를 철저히 엄단하겠다”(이 대통령)고 외치던 결기를 좀처럼 찾기 힘들다.
보수 진영도 마찬가지다. 북한 인권 문제를 강조하면서도 외국인, 다문화 등에 대한 인권 침해는 나 몰라라 침묵하다시피 한다. 국적, 인종, 종교, 젠더 등에 기초해 특정 집단·개인을 배척, 차별하는 공격적 언설을 의미하는 헤이트 스피치가 전형적 사례다. 중국 출신을 상대로 무분별한 혐오를 배설하는 혐중과 중국의 정책·노선에 반대하는 반중은 엄연히 다름에도 양자를 섞어 ‘표현의 자유’ 운운하며 비호하는 태도다. 이른바 한국의 보수·진보는 일본과는 한참 다른 것이다. 일본 보수(자민당)는 헤이트 스피치 방지법을 성립시켰고, 일본 진보(일본공산당)는 납북자 문제 해결을 강조한다.
한국의 보혁·좌우는 인권 본령엔 관심 없고 진영의 정치적 유불리, 이해득실만 따지니 참으로 안타깝다. 인류 역사는 인권 신장의 역사다. 세계인권선언이 제시한 인권의 핵심은 태어날 때부터 갖는 천부적 존엄성이자 평등하고 양도 불가능한 권리로서, 모든 사람이 보편적으로 누려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권위주의 체제보다 우월한 것은 경제적으로 풍요롭거나 군사력이 강하기 때문이 아니다. 인권이 앞서 있기 때문이다.
땅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한쪽에는 ‘인권옹호’를, 다른 한쪽에는 ‘반인권’을 세운다면 어느 쪽에 설 것인가. 인권옹호의 편에 선다면 그 기준으로 북한 인권과 혐중·혐일 등의 인권 문제 해결을 위해 일관되게 노력해야 한다. 형기를 마친 비전향 장기수나 납치를 주장하는 탈북민도 본인이 희망하면 정치적 셈법이 아니라 인도적 관점에서 보내는 결단도 필요하다. 인간 존엄성 훼손 위에선 어떠한 사상이나 체제, 정치도 성공할 수 없다. 진보는 북한 인권 증진에 앞장서고, 보수는 혐오 발언 방지법 제정에 나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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