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제국의 ‘긴 칼’이었다.
‘일제강점기’는 1905년 을사늑약, 1910년 한일합방이 아니라 1904년 러일전쟁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한반도를 영향권에 두려던 러시아 제국을 일본 제국이 저지하면서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전쟁에서 러시아군 최대 12만명, 일본군 최대 8만명의 젊은이가 덧없이 죽었다.
러일전쟁은 대영제국 없이 설명하기 힘들다. 19세기 영국은 나폴레옹을 저지한 러시아에 공포를 느꼈다. 이후 영국 외교의 제1원칙은 ‘러시아 막기’였다. 19세기는 이러한 영국의 외교에서 탄생했다. 역사는 이때 영국의 움직임과 러시아의 대응을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이라 칭한다.
극동에서 영국의 대리인으로 러시아와 맞섰던 국가가 일본이다. 영국은 부동항 확보 목적으로 내려오는 러시아를 막기 위해 일본과 1902년 동맹을 맺었다. 영국은 일본 국채를 매입하는 방식으로 일본의 전비를 댔다. 영국의 조선소에서 19세기의 전략무기인 최신 전함을 건조했고, 일본에 팔았다. 영국 해군도 가져보지 못한 신형 전함에는 ‘미카사’라는 이름이 붙었다. 전함 미카사는 러일전쟁의 승부를 가른 쓰시마 해전에서 대활약했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최대 20여만명의 사상자를 내고 러시아에 승리했다. 그들은 한반도를 얻었다. 역사는 이렇게 말한다. 을사늑약, 한일합방은 국제정세의 냉정함을 알고 피를 흘린 일본이 얻은 대가라고.
2025년 11월은 훗날 ‘역사의 반복’으로 평가받을지도 모른다. 이재명 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회담을 통해 핵추진잠수함 건조를 승인받았다. 핵추진잠수함은 21세기의 전략무기다. 미국은 관세협상 등에서도 한국에 적잖은 배려를 했다.
더불어민주당은 이 대통령의 탁월한 협상 전략으로 얻은 성과라 환호한다. 당장 정청래 대표가 그렇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국제세계는 ‘을’의 진심만으로 ‘갑’을 만족시킬 수 없는 세계다. 19세기의 ‘제국’ 영국이 동정심으로 일본과 동맹을 맺은 것이 아니듯 21세기의 ‘제국’ 미국의 호의 역시 냉철한 판단에 따른 결과다.
미국의 호의는 결국 중국과 벌이는 ‘21세기 그레이트 게임’에서 한국이 ‘일본’의 역할을 하라는 요구다. 제이비어 브런슨 주한미군 사령관은 최근 위아래가 바뀐 동아시아 지도를 공개했다. 주한미군 역할이 북한 억제에서 중국 견제로 나가고 있다는 친절한 설명을 곁들이면서다. 수면 위 설명 속엔 국제사회의 냉정함이 없다. 브런슨 사령관의 수면 밑 설명에는 ‘한국’은 ‘미국’의 칼이 되어야 한다는 속내가 뚜렷하게 보인다. 거꾸로 된 지도 속에는 한반도와 일본이 중국을 포위하고 있다. 19세기 영국은 최신 전함 미카사를 일본에 줬고. 지금 미국은 핵추진잠수함을 우리에게 주었다. 호의는 곧 청구서가 될 것이다. 곧 121년 전의 영국처럼 ‘제국’의 긴 손이 한국을 향할 것이다.
이 대통령의 협상을 폄훼하고 싶지 않다. 그는 최선을 다했다. 협상의 이면에 있는 냉엄한 국제 현실을 직시해야 하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지금의 우리 정치는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가. 2025년 11월, ‘조희대’와 ‘윤어게인’에 사로잡혀 있는 여의도에 던지는 질문이다. 121년 전 일본은 제국의 ‘긴 칼’을 자처했다. 지금 ‘여의도’는 제국의 ‘긴 손’을 느끼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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