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본을 향한 중국의 두드러진 도발 양상 중 하나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의 “대만 유사시 집단적 자위권 행사 가능” 발언이 발단이었다. 대만을 자국의 일부로 보는 중국으로서는 별개로 인식해 군사적 개입 가능성을 시사한 다카이치 총리의 인식을 용납할 수 없다. 중국, 대만을 다른 나라로 보는 것에 맞서 일본과 다른 오키나와의 정체성을 강조하며 비슷한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1897년 강제병합 전까지 ‘류큐 왕국’으로 존재하며 일본보다 중국 명·청왕조와 밀접했던 오키나와의 역사가 근거다.
중국의 공세가 정치적, 외교적 공세이고, 오키나와가 일본의 일부라는 건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오키나와 역사를 중국을 빼고 설명하기는 어렵다. 오키나와 스스로 그렇게 설명한다. 이 때문에 중국과의 관계를 강조하는 지역 정치인들의 행보가 미묘한 파장을 낳기도 한다.
◆“류큐의 국제성은 중국이 시작”
오키나와의 뿌리는 류큐다. 1187년 슌텐(舜天)이 왕을 자칭하고 1897년 일본에 병합되기까지 오키나와는 류큐였다. 류큐의 정체성은 ‘국제성’을 핵심으로 한다. 중국 대륙, 한반도, 일본열도와 가깝다는 지리적 특성을 바탕으로 적극적으로 벌인 외교, 무역이 생존의 조건이었다. 오키나와 기후 및 해양문화 연구, 류큐 왕궁인 슈리성에 대한 조사·지식 보급 등을 담당하는 ‘오키나와 아름다운 섬(沖繩美ら島) 재단’은 “(오키나와의 국제성은) 중국을 시작으로 일본, 조선, 동아시아 제국과의 외교, 무역의 결과로서 생겨났다”고 설명했다. 일본이 아니라 중국을 ‘시작’으로 규정한 것이 주목된다.
가장 중요한 이벤트는 “중국 황제의 이름으로 행해진 류큐국왕의 즉위식” ‘책봉’이었다. 1372년 이래 류큐의 국왕이 바뀌면 중국은 고위관리가 이끄는 대규모 사절단을 류큐로 파견했다. 책봉의식은 류큐의 궁궐인 슈리성의 중앙광장 ‘어정’(御庭)에서 진행됐다. 중국 관리는 중국어로 “그대를 류큐 국왕으로 봉한다”는 책봉문을 읽었고, 새로운 왕은 고개를 숙여 엎드린 채 들었다.
오키나와현립박물관·미술관 소장 ‘봉사류큐도’(奉使琉球圖)는 당시 사절단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푸젠성을 출발해 류큐에 도착한 후 치른 다양한 행사를 20장면으로 나눠 그렸다. ‘책봉사 행렬도’는 사절단이 책봉식을 위해 숙소인 ‘천사관’(天使館)에서 슈리성으로 향하는 모습을 묘사했다. ‘명효종 칙유 류큐국 주잔왕 쇼신 앞’은 명나라 효종이 주잔왕에게 보낸 조서다. 오키나와현립박물관·미술관은 개관 10주년을 맞아 선정한 ‘박물관수장자료 100선’에 중국과의 밀착된 관계를 보여주는 세 유물을 넣어 지금도 큰 가치를 부여하고 있음을 보였다.
오키나와 아름다운 섬 재단은 “책봉을 통해 류큐는 중국과의 결합을 깊게 하고, 무역이나 문화교류를 순조롭게 이어가는 게 가능했다”며 “동아시아 세계의 일원으로 자격을 얻었다”고 소개했다. 또 “(책봉식에서 선보인) 예능은 오늘날 오키나와 예능의 기초가 되었다”고 설명해 중국 전통 문화의 강한 영향력이 지금도 작동하고 있음을 밝혔다.
◆지역 정치인 친중 행보에 미묘한 파문
이런 역사를 갖고 있어 오키나와 지역 정치인들이 중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행보를 보일 때 일본에서는 미묘한 파장이 인다. 중·일 관계가 나쁠 때라면 특히 그렇다.
2023년 7일 다마키 데니 오키나와현 지사가 중국을 방문했을 때 그랬다. 다마키 지사는 중국 방문 전 열린 기자회견에서 “오키나와와 중국의 길고, 깊은 역사를 되살리는 것이 교류발전의 초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명·청시대 중국을 방문했다 현지에서 세상을 떠난 류큐 사절단의 베이징 묘소를 찾아서는 “중국과 오키나와를 확실하게 연결해 평화롭고 풍요로운 시대를 열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다마키 지사의 행보는 전달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중국 사절단의 출발지였던 푸젠성에) 류큐관이나 류큐묘가 있어 깊은 교류가 있었던 것을 알고 있다”고 발언한 것과 맞물리며 관심을 높였다. 당시 아사히신문은 “다마키 지사의 움직임이 일본, 중국 양쪽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시 주석의 발언을 계기로 오키나와가 중화권의 일부라는 목소리가 커질 조짐”이라고 보도했다.
오키나와가 중국과의 관계에 긍정적인 의미를 두는 데는 역사적 배경 뿐만 아니라 일본 정부, 미국에 대한 반감도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1945년 일본 정부는 미군의 본토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오키나와에 ‘옥쇄’(깨끗이 죽음)을 강요했다. 전세가 이미 기울었음에도 최후의 발악에 오키나와를 이용한 것이었다. 당시 오키나와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12만 명 이상이 희생돼 아직도 큰 아픔으로 기억된다.
1972년까지 미국의 통치 아래 있었던 오키나와의 미군기지가 지역 발전를 가로막고, 주민들의 삶을 짓누르고 있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대표적인 것이 미군의 성범죄다. 최근에는 미군 병사가 미성년 일본인 여성을 지난 6월 성추행한 사실이 알려지면 파문을 낳고 있다.
일본 정부는 이런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단 비판을 받아도 마땅한 태도, 정책을 보여왔다. 미군기지의 오키나와 집중도가 시간이 지날수록 높아지는 것이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오키나와 내 주일미군 전용시설 전체 면적은 1만8483ha로 오키나와 본섬의 14%를 차지하고 있다. 일본 전체로 보면 주일미군 전용시설의 70.3%가 오키나와에 집중돼 있다. 일본 내 47개 도도부현(광역지방자치단체) 중 오키나와 주민의 평균 소득이 전국 평균의 약 70%에 그쳐 가장 낮다는 것은 이런 사정과 무관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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