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노벨 과학상 27개, 한국은 0개
단기 성과주의에 의대 쏠림도 우려
창의적 기초연구에 장기 지원 절실
한국 사회는 매년 10월이면 ‘노벨상 앓이’를 한다. 올해도 그랬다. 일본은 올해 노벨 생리의학상에 이어 화학상까지 거머쥐며 기초과학 강국의 위상을 보여줬다. 일본이 지금까지 물리학상 12명, 화학상 9명, 생리의학상 6명 등 노벨 과학상을 27명이나 타는 동안 우리는 아직 한 명도 없다. 올해는 유력 후보자로 거론되는 한국인도 없었다고 한다. 한국이 각 분야에서 거둔 성취를 기려 어디에나 ‘K’를 붙이고 있지만, 과학 분야에선 통하지 않는다.
노벨 과학상은 기초과학 영역에 주는 상이다. 새로운 분야에서 선구적 연구를 수행하고, 그 연구가 인류에 지대한 공헌을 해야 받을 수 있다. ‘노벨 과학상 수상자 분석’을 보면 최근 10년간 수상자 77명은 평균 37.7세에 핵심 연구를 시작해 55.3세에 완성하고 69.1세에 수상한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 시작에서 수상까지 걸린 기간은 평균 32년이다. 올해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 2명도 지방 국립대(교토대·오사카대) 출신의 70대 노교수였다. 꾸준한 기초연구 투자의 결실이다.

일본의 노벨상 저력은 100년을 내다보는 ‘묻지 마 투자’에서 나왔다. 1917년 설립된 기초과학연구소 ‘리켄’은 탄탄한 연구기반을 구축해 ‘노벨상의 산실’이 됐다. 1995년 도입한 ‘과학기술기본법’에 따라 과학기술 진흥을 국가의 책무로 보고, 막대한 국비를 기초연구에 투자했다. 2001년 과학기술기본계획 발표 때는 ‘향후 50년간 노벨상 수상자 30명을 낸다’는 목표도 제시했다.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자유로운 분위기, 한 가지를 파는 장인 정신과 장기적 투자가 성공 비결로 꼽힌다.
우리는 어떤가. 미국·유럽·일본 등 선진국보다 훨씬 늦게 기초과학 투자를 시작했다. 정부 차원에서 기초과학 투자가 본격적으로 이뤄진 건 2011년 기초과학연구원 설립 이후다. 기초과학에 대한 인식도 낮다. 지난해 윤석열정부가 연구개발(R&D) 예산을 16.6%나 깎아 과학·기술계를 분노하게 한 것이 대표적이다. “나눠먹기식 R&D는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윤 전 대통령의 지시에서 비롯됐다. 이로 인해 신규 기초연구 지원 중단, 우수 연구사업이 포함된 예산이 삭감돼 많은 연구자가 짐을 싸야 했다.
단기 성과에 매달리는 R&D 평가 체제도 문제다. 10년짜리 장기 과제도 5년만 지나면 기술 이전, 실용화 요구가 많아 큰 성과를 내기 어렵다. 기초과학 연구 제안서에 여전히 ‘경제적 기대 효과’ 항목을 명시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정책 방향이 바뀌면 연구 주제 역시 유행처럼 바뀐다. 이런 풍토에서 창의적 연구,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가 자리 잡을 수 있을까.
가장 심각한 건 토대마저 무너지고 있다는 점이다. 요즘 과학 인재들이 모두 의대로 쏠리고 있다. 심지어 이공 계열에 진학했던 학생들마저 의대에 가려고 자퇴하는 지경이다. 2018년부터 올해까지 서울대 의사과학자 양성 과정을 마친 48명 중 22명이 연구소가 아닌 병원으로 갔다. 연구직의 소득이 낮고 미래가 불안정해서다. 게다가 정년 퇴임한 국내 석학들의 중국행이 잇따라 충격을 주고 있다. 국가의 과학 인재 관리가 너무 엉성하지 않나.
올해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기타가와 스스무 교토대 특별교수는 “연구 시간을 어떻게든 확보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노벨상 수상자 10명을 배출한 교토대 학풍에 대해선 “아무도 하지 않는 기초적인 것, 재미있는 것을 한다는 점이 전통으로 자리 잡고 그 정신이 이어져 왔다”고 평가했다. 연구자들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장기적인 시각에서 꾸준히 연구를 지원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인공지능(AI) 경쟁에서 보듯이 기초과학 경쟁력이 국력인 시대다. 가야 할 방향은 명확하다. 단기 성과 중심의 연구 관행에서 벗어나, 뚝심 있는 연구자들을 장기적·안정적으로 지원하는 기초과학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연구자들은 세상에 없는 걸 파야 하고, 국가는 시간을 부모처럼 인내해야 한다. 결국 수준 높은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어져야 노벨상이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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