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임 기간이 3년도 안 되는 윤석열 전 대통령의 임기 중 마지막 외국 방문은 2024년 11월 14∼21일 이뤄진 남미 순방이었다. 윤 전 대통령은 먼저 페루 리마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이펙) 정상회의에 참석한 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로 이동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일정을 소화했다. 두 다자회의 모두 ‘김빠진 행사’로 전락했다는 지적이 제기됐는데, 이는 직전 실시된 미국 대선에서 야당인 공화당이 이겨 정권 교체가 확실해졌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이 임박한 가운데 곧 물러날 조 바이든 대통령이 미국을 대표해 왔으니 그 무게감이 확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비록 한반도 정반대편에 있는 남미 대륙에 차려진 국제 무대였으나, 한국 입장에선 북한의 위협에 맞서기 위한 안보 외교가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윤 전 대통령이 바이든 대통령,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일본 총리와 한·미·일 3국 정상회의를 개최한 것은 당연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보면 세 사람 다 진작 물러났거나 퇴임이 예고돼 빛이 상당히 바래긴 했지만 말이다. 비록 눈에 띄는 성과는 없었으나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2년 만에 양자 정상회담을 한 것도 꼭 필요한 일이었다고 하겠다.
한·중 정상의 만남만큼은 아니지만 한·페루 정상회담도 나름 눈길을 끌었다. 정부는 양국이 잠수함 공동 개발 등 방산 협력 가속화에 합의했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2024년 에이펙 의장국이 개최국인 페루이듯 이듬해인 2025년 경북 경주에서 열릴 에이펙은 한국이 의장국 자격으로 주최할 예정이었다. 회의 마지막 날 디나 볼루아르테 페루 대통령은 윤 전 대통령에게 페루 전통 양식으로 만든 의사봉을 전달했다. 에이펙 차기 의장국인 한국의 성공적인 회의 개최를 기원하는 뜻이 담겼다. 의사봉을 받아든 윤 전 대통령은 “에이펙 회원국 정상들 간의 만남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더욱 연결되고 혁신적이며 번영하게 만들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지난 10일 페루 의회가 압도적 표차로 볼루아르테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가결했다는 소식이다. 만성적 경제난과 치안 악화로 민심이 등을 돌린 데다 뇌물 수수 등 부패 의혹까지 불거진 탓이다. 페루는 우리 헌법재판소 같은 기구가 없어 의회 탄핵소추만으로 볼루아르테 대통령은 물러났다. 그에게 에이펙 정상회의 의사봉을 넘겨받은 윤 전 대통령도 12·3 비상계엄 사태로 진작 파면을 당했으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요, 또 악연인가 싶다. 애먼 물건에 책임을 물을 순 없겠으나, ‘그 의사봉 참 꺼림칙하다’란 불길한 생각을 지울 길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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