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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어떻게 진보하고…』 자카리아 “역풍 넘어 진보 성공 위해선 점진적 개혁해야” [김용출의 한권의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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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10-12 08:00:00 수정 : 2025-10-10 21:14:13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EPA·AF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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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소련이 붕괴한 뒤 이례적으로 초강대국 미국만 존재하는 시대에 접어들었지만 곧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2001년 9.11테러가 발발해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전쟁에 깊이 빠져들면서 미국 중심주의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2008년에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쳐오면서 세계의 경제적 안정성마저 휘청거렸다.

사람을 닮은 휴머노이드 로봇

여기에 광대한 인구를 가진 중국이 경제와 안보를 비롯해 전 분야에서 급격하게 부상해 미국과 맞서기 시작했고, 러시아 역시 국제무대에 복귀해 자유주의적 질서에 훼방을 놓으면서 미국 일극체제는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있다. 이 같은 모순은 우크라이나전쟁에서 폭발했다.

 

미국 내부도 당파 싸움이 고조되면서 정치적 안정성 역시 거대한 균열이 생겼다. 특히 공화당은 자유 민주주의 규범보다는 의사당 폭동을 사실상 묵인한 도널프 트럼프 대통령 같은 포퓰리즘에 점령당하고 말았다.

 

“견고한 것은 모두 녹아내려 허공에 흩어지고, 거룩한 것은 모두 모독당하며, 인간은 마침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진정한 삶의 조건과 동족과의 관계를 냉철하게 마주하게 된다.”(「공산당 선언」 중에서)

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가게 되었는가. 현대에 불어 닥친 혁명적 변화의 힘과, 그럼에도 익숙한 구질서로 회귀하고자 하는 역풍이 충돌하는 이 혼돈의 시대를 어떻게 이해하고 헤쳐 나갈 것인가. 이 모든 상황에서도 과연 역사는 진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외교안보잡지 『포린어페어스』 편집장를 역임하고 CNN의 국제 시사프로그램 ‘파리드 자카리아 GPS’를 진행했던 ‘맥락의 대가’인 저자 파리드 자카리아는 신간 『역사는 어떻게 진보하고 왜 퇴보하는가』(김종수 옮김, 부키)에서 우리 시대가 지금 직면한 가장 커다란 질문에 담대하게 도전을 시도한다.

 

저자는 현 시대가 제기하는 이 같은 큰 질문에 답하기 위해 먼저 ‘혁명(revolution)’이란 말뜻부터 풀이한다. 혁명은 ‘되돌리다’는 뜻의 라틴어 ‘레볼베르(revolvere)’에서 유래했는데, 이 단어는 ‘회전하다(revolve)’뿐만 아니라 왕이나 체제에 대한 충성을 되돌리다는 개념에서 발전한 ‘반란(revolt)’이라는 단어도 낳았다. 즉, 혁명이라는 단어에는 ‘급속하게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과 함께 ‘원래 상태로 되돌리려 하는 반작용’이라는 두 뜻이 애초에 다 내포돼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바탕으로 네덜란드 혁명과 영국 명예혁명, 프랑스 혁명, 산업 혁명, 미국 혁명 등 1600년 이후 20세기 이전 세계사의 흥망을 좌우한 주요 혁명과 함께 이들 혁명에 대한 반발과 역풍도 함께 살펴본다. 이 과정에서 앞선 혁명이 뒤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각 혁명간 상호 관계와 부작용 등을 면밀히 검토하기도 한다. 특히 그 동안 근현대 혁명 가운데 상대적으로 등한히 했던 네덜란드 혁명을 검토의 첫 자리에 놓은 뒤 그 의미와 역할, 한계 등을 제대로 재조명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16세기 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네덜란드는 주식회사 제도를 도입하고 증권거래소와 은행을 설립해 금융을 안정화한 것을 비롯해, 비교적 높은 수준의 지역 분권과 자치 보장, 운송 혁신과 강력한 해군 유지, 종교와 사상의 자유 보장 등을 통해 최초의 근대적 자유주의 혁명을 성공시킨다. 하지만 종교 갈등과 프랑스의 침략 등의 국제적 역풍을 부른 뒤 서서히 쇠퇴하고 말았다.

반세계화 시위를 벌이는 시위대

그럼에도 네덜란드 혁명은 지역 자치에 근간을 둔 민주적 정치 체제, 기술과 제도의 혁신, 종교와 사상의 자유, 주식회사 제도 등의 성과를 영국으로 이전해 명예혁명 성공에 기여했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이미 40여 년 전 청교도 혁명을 경험했던 영국은 1688년 명예혁명을 통해 유혈 사태 없이 입헌주의를 확립했다. 정치 참여의 협소성이라는 한계가 있었음에도, 장기적으로 영국을 세계를 선도하는 산업혁명과 산업 강국의 길로 이끌었다는 평가다.

 

프랑스 혁명에 대해선 상당히 비판적이다. 즉, 자유와 평등, 박애의 가치를 든 대단히 진보적인 운동이었지만, 기술 혁신과 자치보다 혁명을 급격히 추구하다가 대중으로부터 일어난 역풍에 의해 좌절됐다고 저자는 본다. 로베스피에르와 단두대로 상징되는 공포 정치와 나폴레옹 제국과 왕정복고로 이어지며 선한 영향력뿐만 아니라 나쁜 영향력도 남겼다는 것이다. 레닌은 러시아 혁명에서 프랑스 혁명을 의식적으로 차용했고, 마오쩌둥의 중국 혁명에도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았다고 덧붙인다.

 

산업혁명은 기계화와 도시화를 통해 생활을 혁신했지만, 노동 착취와 빈부 격차, 이에 따른 계급 갈등의 격화라는 부작용을 낳았다. 미국 혁명의 경우 영국으로부터 독립 전쟁에 승리하고 네덜란드와 영국으로 이어진 자치와 공화주의, 기술과 제도의 혁신, 개방과 포용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근대 민주 공화국의 모델을 세웠지만, 노예제와 인종 차별, 내전이라는 모순을 남겼다고 지적한다.

 

“...네덜란드, 영국, 미국의 사례처럼 지속적 번영을 이룩한 가장 성공적인 혁명조차 심각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프랑스 혁명의 실패는 급진적 변화에 대한 공포로 이어졌고, 오늘날까지 그 그림자를 드리우며 현대판 보수주의의 기원이 되었다.”(486쪽)

 

저자는 그러면서 현 시대의 경우 기술정보혁명과 세계화 혁명, 정체성 혁명, 지정학 혁명 등이 동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며, 현재의 혼란과 갈등에 대한 대응 방안을 모색한다. 먼저 세계화 혁명은 자본, 상품, 아이디어가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게 해 우리나라 같은 나라를 선진국 반열에 올려놓았지만, 외환 위기와 양극화 심화, 보호무역주의라는 역풍을 동반했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우크라이나 바흐무트에서 포탄을 나르는 우크라이나 병사들

이어서 정보혁명은 인터넷, 스마트폰, 소셜 미디어로 지식과 참여를 민주화했지만, 동시에 혐오, 음모론, 민주주의 분열을 확산시켰고, 각 개인을 공동체에서 멀어지고 개별로 흩어지는 사회에서 ‘고독한 왕’으로 만들었다고 꼬집는다.

 

“소셜 미디어는 점점 더 많은 온라인 연결을 촉진했으나 미국인들은 점점 더 외로워졌다. 친한 친구가 10명 이상이라고 답한 미국 남성의 비율은 1990년 40퍼센트에서 2021년 15퍼센트로 감소했다. 놀랍게도 친한 친구가 없다고 답한 비율은 3퍼센트에서 15퍼센트로 증가했다.”(333쪽)

 

이와 함께 과거와 같은 진영 논리는 좌우 어느 쪽도 설득하지 못하고 있는 반면 인종, 성별, 종교, 지역 등 소속 의식이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면서 세계 곳곳에서 정체성 혁명을 겪고 있다고 진단한다. 문화, 취향, 여성, 성소수자, 이민, 정체성에 대한 개인의 지향이 이데올로기를 압도하는 시대가 됐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젠더 갈등과 극심한 문화 전쟁이라는 역풍을 낳았다고 지적한다.

 

여기에 1990년대 냉전이 해체된 이후부터 미국 일극 체제가 무너지고 중국과 러시아가 다시 부상하면서 다극 체제와 영토 분쟁이 돌아온 지정학 혁명이 이어지고 있다. 지정학 혁명은 신흥국들의 자신감을 키웠지만, 우크라이나 전쟁과 미중 패권 대결이라는 불안정성을 가져왔다.

 

저자는 1600년 이후 혁명과 반동의 역사와 현대의 혼란을 총괄하면서 역사에서 이룩한 진보를 과거로 되돌릴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혁명이나 혁명적 변화에는 늘 역풍이 있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그 역풍의 근원에는 지속적이고 점진적인 개혁이 아닌 극단적 포퓰리즘, 극단주의가 자리하고 있다며 철학자 이사야 벌린의 다음 이야기를 인용한다.

 

“...인류에게 유일한 진정한 이상이라는 이유로 모든 것을 아우르는 단 하나의 이상만을 추구한다면, 그 결과는 예외 없이 강압으로 귀결되고 만다. 그리고 그다음은 파괴와 유혈뿐이다. 달걀은 깨졌지만 오믈렛은 아직 보이지 않고, 깨질 준비가 된 무수한 달걀들 즉 희생될 인간의 생명만이 남게 된다. 결국 열성적 이상주의자는 오믈렛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잊어버린 채 계속 달걀을 깨기만 한다.”(508쪽)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현대의 혁명적 변화와 그 역풍을 헤쳐 나가야 하는 것일까. 저자는 “결국 장기적으로 볼 때 단 하나의 가능한 길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40쪽)이라며 진보의 길에서 후퇴하지 않되, 고조되는 역풍에 대한 적절한 관리와 수용도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즉 적절한 속도 조절과, 관용적인 포용, 제도의 복원, 균형 있는 지정학 관리가 함께 요구된다며 규칙과 절차, 타협에 중점을 준 지속적이고도 점진적인 자유주의를 견지하라고 강조한다.

 

“극단주의가 일시적 만족감을 줄 수 있지만, 점진적 개혁이야말로 지속적 변화를 가져오는 경우가 더 많다. 자유주의자는 시간이 자신들 편이며 그들의 반대편이 항상 악하거나 어리석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면, 폭넓은 지지를 얻을 수 있고 더디지만 꾸준한 진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509쪽)

 

요컨대, 책은 근현대 주요 혁명 분석을 통해 거대한 근본 변화에는 반드시 반동이나 역풍이 불가피하다며 결국 점진적인, 그러면서도 지속적인 개혁을 통한 진보의 실천을 조언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원제는 Age of Revolu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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