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부권 남발·회의 파행 등 야기
기후 대응, 시간 싸움 알면서도
만장일치 벽에 막혀 진전 더뎌
만장일치 규칙 아래에서는 집단의 모든 개별 구성원이 결정에 인과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리고 1652년에서 1791년 사이에 만장일치제를 도입했던 폴란드인들은 1795년 국가가 붕괴할 때까지 이 규칙을 열성적으로 옹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제도를 실제로 운용한 사례는 폴란드가 유일하다. … 집단이 스스로 통치한다는 것은 모든 개별 유권자가 최종 결과에 인과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모든 개인의 의사가 집계되어 집단의 결정이 내려질 때, 그 집단은 스스로 통치한다. (애덤 셰보르스키, ‘민주주의, 할 수 없는 것과 할 수 있는 것’)
한때 유럽에서 가장 큰 영토를 자랑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1569~1795년)의 의회는 독특한 의사결정 제도가 있었다. 의원 중 누구라도 ‘나는 인정하지 않는다!’고 외치면 입법 절차를 중단시킬 수 있었던 것. 다수의 횡포를 막겠다는 의도로 만장일치제를 도입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거부권이 남발되고 외세에 매수된 의원이 의회를 파행으로 몰고가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짧은 전성기를 뒤로하고, 결국 러시아?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제국에 먹혀 지도에서 사라지고 만다.

이런 문제 때문에 오늘날 만장일치제로 국가를 운영하는 나라는 없다. 적어도 표면적으론 그렇다. 그런데 초국가 단위에선 만장일치제가 불문율인 경우가 왕왕 있다. 유엔 기후변화협약(COP)과 오는 5일 개막하는 국제 플라스틱 협약 제5차 정부간 추가 협상회의(INC 5.2)가 대표적이다.
지난해 부산에서 열린 ‘마지막’(이어야 했던) 플라스틱 협약은 당사국 뜻을 하나로 모으는 데 실패했고, 그래서 예정에 없던 ‘찐막’(이길 바라는) 협약이 열린다. 그러나 이번에도 전망은 밝지 않다. 사우디아라비아, 러시아, 이란 등 석유?가스 생산국들이 ‘플라스틱 생산을 제한하면 안 된다, 쓰레기 문제에만 집중하자’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서다. COP 역시 화석연료 퇴출과 기후재원 마련을 두고 만장일치의 덫에 걸려 고통스러우리만큼 느리게 진도를 밟아가고 있다.
기후 대응은 시간 싸움이라면서 굳이 만장일치를 고집하는 이유를 생성형 인공지능(AI)에 물어보면 대충 이런 답이 나온다. ‘모든 국가의 주권을 존중하고, 실행력을 확보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설명은 꿈보단 해몽에 가깝다.
플라스틱 협약과 기후변화 협약의 회의규칙(rules of procedure)엔 정작 ‘만장일치’(unanimity)란 단어는 없다. 유엔 기후체제는 1990년대 초 ‘최대한 합의(consensus)에 이르도록 노력하되, 그러지 못할 경우 최후의 수단으로 다수결을 따른다’는 회의규칙 초안을 마련했지만, 만장일치를 주장하는 일부 국가의 반대로 채택하지 못했다.
그 후에도 다수결을 포함한 회의규칙이 여러 번 제안됐지만 번번이 채택에 실패하고 말았다. 다수결로 정해도 된다는 규정이 없으니 합의를 만장일치로 ‘해석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플라스틱 협약도 비슷한 전철을 밟았다. 두 환경 협약이 만장일치제로 운영되는 건 거룩한 뜻이 있어서라기보단 일종의 입법부작위인 셈이다.
플라스틱 INC 5.2를 앞두고 회의규칙이 다시 도마에 올랐다. 이번에도 만장일치에 실패하면 다수결을 강행해야 한다는 의견부터 안건을 분리해 다루자거나 아예 유엔 체제 밖에서 전권외교회의로 진행하자는 주장도 나온다.
만장일치를 금과옥조로 여길 필요가 없다는 해석도 있다. 영국 기후전문 매체 카본브리프에 따르면, 실제로 2010년 멕시코에서 열린 COP16에서 의장은 “합의는 만장일치를 의미하지 않는다”며 볼리비아의 반대를 기각하고 칸쿤 합의를 채택했다. COP18에서도 러시아가 합의에 반대하며 발언권을 요청했지만 의장은 “논의를 연장하는 것은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과 같다”며 의사봉을 두드렸다.
폴란드 출신 미국 정치학자 셰보르스키의 ‘민주주의, 할 수…’는 이렇게 끝난다. ‘우리가 민주주의의 한계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그러지 않으면 많은 경우, 그 누구에 의해서도 또 그 어떤 곳에서도 실현될 수 없는 공약을 내세우며 정치적 권력을 잡으려 하는 데마고그(선동가)의 선동적인 호소에 쉽게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 어떤 개혁은 시급하며, 많은 개혁이 실현 가능하다.’
국제합의를 가로막는 게 과연 만장일치제인지, 부족한 의지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윤지로 사단법인 넥스트 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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