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8월 이기명 고등과학원 부원장이 중국 베이징 수리과학·응용연구소로 이직하자 과학기술계가 술렁거렸다. 이 전 부원장이 우주의 기원을 찾는 ‘초끈이론’과 양자역학 전문가로 한국을 대표하는 이론물리학자였기 때문이다. 2006년 ‘국가 석학’으로 선정됐고, 2014년에는 대한민국 최고과학기술인상을 받았다. 그가 중국으로 간 이유는 정년퇴임 후 국내에선 연구할 자리가 없어서다. 고등과학원은 석학교수로 남기려고 했지만 예산 부족으로 무산됐다. 이렇듯 한국 과학기술을 이끄는 석학 10명 중 6명이 해외 영입 제안을 받았다고 한다.
미국, 중국 등 주요 국가들은 인공지능(AI)·반도체 등 첨단산업을 주도하기 위해 인재 확보 전쟁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2010년 이후 이공계 학부생 및 대학원생 수만 명이 해외로 떠나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우리나라의 인구 1만명당 AI 인재 순유출은 0.36명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 35위로 최하위권이다. 고대역폭메모리(HBM)의 개발 주역으로 존경받는 최고 과학자의 제자들이 국내에 남기보다 엔비디아·구글 같은 미국 빅테크 취업을 선호한다니 걱정이다.
이런 와중에 최근 4년간 서울대에서 교수 56명이 해외 대학으로 옮겨간 것으로 나타났다. 교수 41명은 미국으로, 나머지는 홍콩, 싱가포르 등 아시아의 톱 대학들로 이직했다. 카이스트(한국과학기술원), GIST(광주과학기술원), DGIST(대구경북과학기술원), UNIST(울산과학기술원) 등 4대 과학기술원의 교수 18명도 해외 대학으로 갔다. 정부의 등록금 동결 정책으로 한국 대학교수들 연봉이 10여년간 정체된 탓에 더 나은 연구환경을 찾아 떠나는 것이다. 연구 역량과 노하우, 네트워크를 갖춘 석학 한 명이 해외로 나가는 건 작은 연구소 하나가 통째로 빠져나가는 것과 다름없다.
우리나라는 자원이 변변치 않아 가진 게 사람밖에 없다. 핵심 두뇌 유출은 국가의 미래를 잃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 이재명정부가 ‘AI 3대 강국 도약’을 다짐했지만 이를 이끌어 갈 인재가 없다면 헛구호에 그칠 것이다. 핵심 인재를 지키고 영입하는 대책 마련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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