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배터리, 북미 수요 87%가 중국산
고관세 부담에 한국 기업 찾을 가능성
애플 아이폰 90%, 中 현지 공장서 생산
삼성전자, 스마트폰 경쟁 앞설 기회 생겨
갈 곳 잃은 중국산 물량, 美 외 풀린다면
韓, 가격 경쟁 인한 출혈 불가피 분석도
통상업계 “90일 유예기간 대미 협상 중요
경쟁력 높이고 기업 간 협력만이 살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90일간의 상호관세 유예 조치를 전격 발표하면서, 국내 기업은 한숨을 돌렸다. 중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율은 되레 125%로 상향되면서 중국 업체, 중국에 공장을 둔 미국 업체와의 미국 시장 내 경쟁은 유리해졌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다만 유예가 한시적 조치이며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를 이용해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는 의도가 분명한 만큼, 원천 기술 확보와 대미 협상력 제고만이 근원적인 해법이라는 제언이 나온다.

10일 업계에선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유예, 대중(對中) 관세 저격으로 국내 기업이 수혜를 볼 품목으로 중국의 대미 수출 비중이 높은 제품들이 꼽힌다. 미국 국제무역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의 대미 수출 품목 1∼3위는 스마트폰(9%), 컴퓨터(7%), 배터리(3%)다.
이 중 에너지저장장치(ESS) 배터리는 국내 기업이 반사이익을 볼 가능성이 가장 높은 품목으로 지목된다. 미국 ESS 시장을 CATL, BYD, EVE 등 중국 업체들이 장악하고 있어서다.
시장조사기관 SNE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북미 ESS 배터리 수요는 78기가와트시(GWh)로, 이 중 약 87%(68GWh)가 중국산이었다.
이번 조치로 중국 배터리 업체의 기존 고객들이 관세에 부담을 느껴 한국 기업을 찾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오익환 SNE리서치 부사장은 “북미 ESS 수요는 계속 확대되고 있는데 (중국 업체가 빠지면) ESS 배터리를 공급할 수 있는 업체는 한국뿐”이라고 말했다. 북미 ESS 배터리 시장은 올해 97GWh에서 2030년 179GWh로 두 배 가까이 늘어날 전망이다.
스마트폰의 경우 삼성전자가 애플과의 경쟁에서 앞설 기회가 생겼다. 현재 애플이 아이폰의 90%를 중국 공장에서 만들고 있어서다. IT전문매체 나인투파이브맥은 대중 125% 관세 시나리오에 대해 “현재 아이폰16 프로 256기가바이트(GB) 모델은 원가가 약 580달러(약 85만원) 수준인데, 125% 관세가 적용되면 애플의 수익을 제외해도 (미국 내 판매가가) 1305달러(약 190만원)가 된다”고 내다봤다.

삼성전자는 베트남과 인도에서 전체 스마트폰의 80%를 생산 중인데, 이들 국가에 대한 상호관세가 유예되면서 잠시나마 시름을 덜게 됐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이 일부 미국 기업에 대한 관세 면제를 시사해 호재가 아닌 악재가 될 가능성도 있다. 앞서 트럼프 1기 정부 당시에도 일부 애플 기기에 대한 관세 면제가 시행된 바 있어 이번에도 가능성이 높다는 게 업계 중론이다.
우리나라 주력 산업인 반도체의 경우 이번 조치로 인한 영향이 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반도체가 상호관세 대상이 아니고, 글로벌 매출로 봤을 때 미국으로 수출되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작아서다.
다만 관세로 반도체가 탑재되는 정보기술(IT) 기기 수요가 줄면 전체적인 시장이 위축될 수 있다. 전방산업 고객사가 관세로 인한 가격 인상 부담을 떠넘길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관세 유예의 ‘나비 효과’도 주목해야 한다. 중국이 미국에 수출하던 물량을 다른 시장으로 돌리며 물량 공세에 나설 가능성이 제기된다. 삼성전자, LG전자 등 국내 기업들은 신흥 시장으로 떠오른 글로벌 사우스의 중심인 인도 시장 공략에 열을 올리고 있다. 관세 조치로 갈 곳 잃은 중국산 물량이 인도에 풀리게 되면 가격 경쟁으로 인한 출혈이 불가피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통상업계에선 관세가 유예된 90일간 정부가 대미 협상에서 어떤 결과를 끌어내느냐가 향후 시장 판도를 좌우할 것이라고 본다.
한아름 한국무역협회 수석연구원은 “우리가 대미 무역흑자를 어떻게 줄일지 대안이 있어야 협상이 순조로울 것”이라며 “트럼프 행정부가 지적한 비관세 장벽을 다 포기할 순 없겠지만, 가능한 선에서 정책 목적을 달성하고 기업 규제 완화 등으로 우리 기업을 지원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허윤 서강대 교수(국제통상학과)는 “통상 협상이 정치 이슈가 되면 안 될 것”이라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나 쇠고기 광우병 때처럼 정치화되면 안 된다. 냉정하게 초당적으로 국익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제언했다. 허 교수는 또 “정부가 검토 중인 ‘패키지 딜’은 협상 대표의 재량권에 달렸으니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어느 정도의 재량권을 확보해주느냐도 중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재계에선 자체 경쟁력 강화, 기업 간 협력만이 살길이라는 인식이 대두하고 있다.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겸 SK그룹 회장은 최근 한국과학기술원(KAIST·카이스트)에서 열린 토크콘서트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를 높여 공장을 한국이 아닌 다른 국가로 옮기는 상황이 생기더라도 백그라운드 기술이 없으면 다른 나라에서 (성공)할 수 없다. 인공지능(AI)과 제조업을 결부한 경쟁자들이 공장을 만들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편 정부는 급변하는 무역 환경에서 수출 시장 다변화를 꾀하기 위해 브라질과 무역동반자협정(TPA) 체결을 추진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2월 브라질에 TPA 체결을 제안하는 내용의 비공식 협상 문서(넌페이퍼·nonpaper)를 발송했다. 정부는 초기 입장 타진을 위해 문의한 상태로, 브라질 측에서는 내부 검토를 해보겠다고 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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