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해 살릴 수 있어도 알리지 않을 수 있다.”
올해 2월 의대 2000명 증원으로 시작된 의·정 갈등을 취재하며 의사들에게 들은 가장 충격적인 말이다. 전공의들이 병원을 떠나 빚어진 의사 공백은 응급실 위기를 불렀다. 인력이 부족한 기피 과는 물론 수술 후방 지원 과들마저 연쇄효과로 가동이 어려워졌다. 이런 상황에 의사가 ‘살릴 가능성이 있지만 인력 등 부족으로 위험한 수술’을 스스로 배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의대 증원 갈등은 의사의 양심을 갉아먹고 있었다.
병원이 응급환자를 거부하는 ‘응급실 뺑뺑이’도 쌓였다. 응급환자를 위한 체계(1339)가 119로 통합돼 빚어진 현상이라며, 응급실 뺑뺑이는 이전에도 많았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이 부각된 건 의료체계가 불안한 터널을 지나고 있다는 증거다.
지방 중소병원 응급실에선 사망 환자가 늘었다. 올해 1∼7월 지역응급의료기관을 내원한 경증·비응급 환자는 지난해 101만4538명에서 94만399명으로 줄었지만, 사망자는 295명으로 지난해(228명)보다 29.3% 늘었다. 정부는 “연령과 기저질환 등 상세 분석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의·정 갈등에서 비롯한 것이면 누구의 책임일까.
의·정 갈등의 가장 큰 폐해는 의사 및 우리 의료체계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다. 전공의의 ‘탕핑’(?平·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음)도 결과적으론 사태만 키웠다.
최근 전국의사대표자대회에 나선 의대 교수 등은 “전공의·의대생에 빚지고 있다”고 앞다퉈 사과했다. 의사 출신 개혁신당 이주영 의원도 차기 대한의사협회(의협) 회장에 ‘전공의·의대생의 결단·희생을 보상하라’고 했다.
선배 의사들이 전공의·의대생에 미안함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전공의들이 법정 근로시간 이상 일하며 낮은 월급을 받는 건 불합리한 수련 환경을 수십년간 감내한 선배 의사들, 비정상적 수가에 전공의의 ‘값싼 노동’을 토대로 박리다매를 택한 상급종합병원이 빚어낸 결과다. 선배 의사들은 수련 환경 및 수가 개선에 더 절실했어야 했다. 이를 방치한 정부도 책임이 크다.
섣부른 정책은 사태를 촉발하고 키웠다. 정부는 ‘2000명 증원’을 고수하더니, 결국 2025년 증원 규모는 1509명이다. 이마저도 의료계와 ‘싸움’에서 물러설 수 없어, 국립대 총장들 제안에 따른 자율조정 형식으로 줄였다. 의사 공백 대책인 시니어 의사제는 지원자가 없어 유명무실하고, 응급실 파견 군의관·공보의는 기대한 몫을 못해 복귀했다.
의·정 간 타협 시기마다 2000명 증원을 육성 고집한 윤석열 대통령은 국민을 볼모 삼은 비상계엄 선포로 수사·탄핵심판 절차를 받고 있다. 세계가 놀란 황당하고 무책임한 사건인데, 계엄 포고령의 ‘전공의 처단’ 문구엔 증원 ‘아집’과 전공의에 대한 비뚤어진 분노마저 담겼다. 꼭 사과할 일이다.
이번 주 정시 모집이 확정되면 2025년 의대 증원은 되돌릴 수 없다. 이 의원도 “책임질 사람이 없어 증원을 막아내는 건 희망적이지 않다”고 했다.
박형욱 의협 비상대책위원장은 23일 ‘2026년 정원 원점 논의’ 등 정부 태도 변화가 먼저라고 했다. 내년에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정부는 현실적 대안에 응답해야 한다. 당장 시급한 내년 의대 교육 환경 마련에 누구든 함께 힘써야 할 때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