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쇼핑·전자상거래서 자주 등장하기도…소비자 구매 촉진
홈쇼핑이나 온라인 쇼핑몰에서 2만9900원, 1만9900원처럼 끝자리가 9인 가격을 흔하게 볼 수 있다. 3만원, 2만원과 불과 100원 차이지만 소비자에게는 각각 2만원대, 1만원대 가격으로 인식돼 저렴하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불과 몇십원, 몇백원의 차이가 소비자의 가격 인식에 영향을 미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판매자들이 굳이 가격의 끝자리를 9로 맞추는 데는 어떤 심리가 숨어 있을까. 가격표 속 숫자에 숨은 소비 심리를 들여다봤다.
◆ 3만원 대신 2만9900원…‘단수 가격 전략’이 바꾸는 인식
상품 가격을 딱 떨어지는 금액으로 정하지 않고 끝자리를 낮춰 가격을 제시하는 방식을 ‘단수 가격 전략(odd pricing)’이라고 한다.
이은희 인하대학교 소비자학과 교수는 “2만9900원이면 사실상 3만원이지만, 소비자는 2만원대 가격과 가깝게 인지하게 된다”며 “실제로는 큰 차이가 없지만 소비자 입장에서는 저렴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 가격 설정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3만원짜리 상품을 2만9900원으로 표시하면 실제로 할인된 금액은 100원뿐이다. 하지만 소비자는 ‘3만원’보다 ‘2만원대’라는 인상을 먼저 받는다. 이 과정에서 함께 작용하는 심리가 ‘왼쪽 자릿수 효과(left-digit effect)’다. 가격을 판단할 때 오른쪽의 세부적인 숫자보다 맨 왼쪽 숫자에 먼저 주목하면서, 실제보다 더 큰 가격 차이가 나는 것처럼 받아들이는 현상이다.
2009년 당시 미국 콜로라도주립대 교수였던 케네스 매닝과 데이비드 스프로트는 이 심리를 실험으로 확인했다. 참가자들에게 2달러 펜과 4달러 펜을 제시하고 가격 표시를 달리해 선택을 비교한 것이다. 한 집단에는 4달러 펜을 3.99달러로, 다른 집단에는 2달러 펜을 1.99달러로 낮춰 표시했다.
결과는 흥미로웠다. 2달러와 3.99달러를 비교한 집단에서는 44%가 상대적으로 비싼 3.99달러 펜을 선택했다. 반면 1.99달러와 4달러를 비교한 집단에서는 4달러 펜을 고른 비율이 18%에 그쳤다. 3.99달러와 4달러의 실제 차이는 1센트에 불과했지만, 4달러가 3달러대로 내려가면서 소비자는 가격이 크게 낮아진 것처럼 받아들였다. 실제 가격 변화폭보다 왼쪽 자릿수가 바뀌었다는 사실이 가격 판단에 더 강하게 작용한 셈이다.
임명호 단국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는 “10원이나 100원 정도 저렴한 것은 인지적으로 따져보면 큰 차이가 아니다”며 “소비자는 얼마나 저렴한지를 계산하기보다 ‘저렴하다’는 사실 자체에서 정서적인 만족을 얻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 ‘9로 끝나면 저렴하다’…반복된 할인 경험이 만든 가격 신호
끝자리가 9로 끝나는 가격이 소비자에게 저렴하게 받아들여지는 데에는 오랜 기간 축적된 소비 경험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볼 수 있다.
할인 상품이나 저가 상품에 9로 끝나는 가격이 반복적으로 사용되면서 소비자에게 ‘9는 저렴한 가격’이라는 연결고리가 형성됐다는 것이다. 실제 관련 연구에 따르면 소비자들이 9로 끝나는 가격을 다른 가격보다 낮게 인식하고, 해당 상품을 구매하려는 의도 역시 높아지는 경향이 나타났다.
임 교수는 “소비자는 오랫동안 9라는 숫자를 할인이나 저렴한 가격과 연결해 학습해 왔을 수 있다”며 “9로 끝나는 가격을 보면 ‘저렴하게 샀다’는 만족감을 느끼고, 반대로 다른 숫자로 끝나는 가격을 보면 오히려 가격을 의심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 온라인·홈쇼핑서 유독 눈에 띄는 ‘9’…판매자의 구매 유도 전략
소비자에게 9가 ‘저렴함’을 떠올리게 하는 가격 신호가 됐다면 판매자 입장에서는 이를 활용할 유인이 충분하다. 특히 홈쇼핑은 정해진 방송 시간 안에 구매를 이끌어야 하고, 온라인 쇼핑몰에서는 수많은 상품이 한 화면에서 경쟁한다. 이런 상황에서 9로 끝나는 가격은 하나의 마케팅 장치로 활용된다.
이 교수는 “단수 가격 전략은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활용되지만, 홈쇼핑처럼 방송 시간대가 정해져 있는 경우 그 시간 안에 구매를 유도하기 위해 더 자주 쓰이는 경향이 있다”며 “소비자에게 촉박감을 느끼게 하고,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을까 하는 감정을 자극하는 효과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오프라인 매장에 비해 온라인 공간이나 화면 안에서 상품이 판매될 때는 훨씬 많은 공급자가 작은 화면 안에서 경쟁하기 때문에 소비자의 눈에 띄기가 쉽지 않다”며 “다른 사람들이 많이 선택하는 상품을 더 매력적으로 받아들이는 밴드웨건 효과와 결합해 구매를 유도하는 경우도 있다”고 덧붙였다.
◆ ‘9’로 끝난다고 정말 싼 가격일까…9800만건 데이터가 보여준 반전
소비자가 저렴하다고 느끼는 이런 가격은 실제로도 다른 가격보다 정말 저렴한 걸까.
시카고대학교 저널 ‘Journal of the Association for Consumer Research’에 실린 2021년 연구가 이 질문에 답을 내놨다. 미국 소매 가격의 40~95%를 차지할 만큼 흔한 9엔딩 가격에 대해, 소비자의 인식이 실제 가격과 얼마나 일치하는지를 검증한 것이다. 연구진은 미국 대형 식료품 체인의 스캐너 가격 데이터 9800만건 이상을 분석했다.
분석 결과는 예상을 뒤집었다. 9로 끝나는 가격은 소비자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었지만, 실제로는 반드시 더 저렴한 가격은 아닌 것으로 나타났다. 오히려 9로 끝나는 가격이 다른 숫자로 끝나는 가격보다 최대 18% 더 비싼 경우도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시간이 흐르며 9로 끝나는 가격이 다른 숫자로 끝나는 가격에 비해 상당 부분 상승했는데도, 소비자들이 이를 잘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임 교수는 이러한 현상을 ‘유지 편향’과 연결해 설명했다. “9라는 숫자가 싸다고 생각해 과거에 소비를 해왔는데 갑자기 그 판단을 바꾸게 되면, 과거 9로 끝나는 가격을 보고 합리적인 소비를 했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행동까지 부정하고 잘못됐다고 인정하는 셈이 될 수 있다”며 “사람은 그동안 유지해 온 판단이나 행동을 계속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9엔딩에 대한 인식에도 일종의 관성이 생긴다”고 말했다.
◆ 소비자가 얻는 것은 ‘저렴하게 샀다는 느낌’
가격표에서 2만9900원과 3만원의 실제 차이는 100원이다. 하지만 소비자가 받아들이는 가격의 차이는 단순한 산술 계산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왼쪽 자릿수가 달라지면서 실제 가격보다 큰 차이를 느낄 수 있고, 여기에 9로 끝나는 가격을 할인 상품과 함께 반복적으로 접한 경험이 더해지면서 ‘9=저렴하다’는 인식이 만들어진 것이다.
결국 가격표 속 끝자리 숫자 ‘9’는 소비자에게는 오랜 소비 경험을 통해 ‘저렴함’을 떠올리게 하는 가격 신호로, 판매자에게는 소비자의 구매를 이끌어 내는 하나의 전략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임 교수는 “우리는 소비와 같은 중요한 결정을 할 때 감정적으로 판단하면서도 자신은 이성적으로 판단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며 “소비자 입장에서는 조금 더 저렴하게 샀다는 만족감 때문에 선택하는 경우가 많고, 결과적으로 ‘합리적인 소비를 했다’는 정서적인 만족감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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