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最古)의 민주주의 국가인 영국에 대법원이 생긴 것은 비교적 최근인 2009년의 일이다. 그 전까지는 의회 상원에 속한 이른바 ‘법률 귀족’(Law Lords)이 상고심 재판을 담당했다. 하원과 달리 상원의원은 귀족만 될 수 있다. 따라서 귀족 신분이 아닌 법률가는 최고 사법기관 진입이 아예 봉쇄된 셈이었다. 이에 영국은 의회와 분리된 별개의 대법원 조직을 신설키로 했고, 그 결과 2009년 평민 출신을 포함해 총 12명으로 구성되는 지금의 대법원이 출범할 수 있었다. 같은 ‘영미법계 국가’라고는 해도 사법부를 대하는 영국과 미국의 차이는 이토록 크다.
영국 식민지에서 독립한 미국은 1787년 지금의 헌법을 제정했다. 영국과 달리 입법·행정·사법 삼권분립을 규정하고 입법부 및 행정부와 대등한 권력을 사법부에 부여했다. 다만 대법원장과 대법관을 비롯한 연방법원 판사들은 의회 상원의 동의를 거쳐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했다. 대법원장은 사법부 대표이자 국가 요인이면서도 대법관은 물론 하급심 법관들 인선조차 힘을 쓰지 못한다. 미국식 제도를 따르는 상당수 대통령제 국가들 또한 그렇다. 이를 두고 ‘최고 사법기관인 대법원의 인적 구성이 지나치게 정치적 입김에 휘둘릴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한국은 일찌감치 미국식 대통령제를 받아들였다. 다만 대법관 인선 방식은 미국과 사뭇 다르다. 우리 헌법은 ‘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104조 2항)라는 규정을 뒀다. 대법원장이 이른바 ‘제청권’을 근거로 삼아 대법관 인선에 관여할 길을 열어둔 것이다. 정치적 색채가 짙은 대통령 및 국회에 대법관 임명의 전권을 맡기는 경우 사법부에 요구되는 정치적 중립성이 훼손될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란 해석이다. 물론 “대법원장이 대법관 제청권을 무기 삼아 일선 판사들을 줄 세울 수 있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사법 개혁’을 표방한 문재인정부 시절 대법원장의 대법관 임명 제청권 폐지가 거론됐다. 당시 김명수 대법원장은 “사법부의 제청, 입법부의 동의, 행정부의 임명 등 삼권분립 이념이 잘 구현된 절차”라며 강하게 반대했다. 요즘 대법원에 결원이 발생했는데도 조희대 대법원장이 이재명 대통령을 상대로 새 대법관 임명 제청권 행사를 계속 미뤄 말들이 많다. 전임 윤석열정부 때 취임한 조 대법원장으로선 제청권 행사가 이 대통령의 비토(거부)에 직면할 가능성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제청권 보장’에 관한 청와대의 뚜렷한 신호 발신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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