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인류는 왜 영성을 찾는가— 세계사를 움직인 15인의 영성] <11> 존 웨슬리(John Wesley)-“대중 속으로 들어간 종교”

관련이슈 참사랑 , 한민족 대서사시

입력 :
정성수 종교전문기자 hulk19838@segye.com

인쇄 메일 url 공유 - +

“온 세상이 나의 교구다”…거리와 광산에서 시작된 감리교 운동

종교개혁 이후 유럽 교회는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루터와 칼뱅이 외친 개혁은 개신교의 탄생으로 이어졌고, 가톨릭 역시 반종교개혁을 통해 교회를 정비했다. 그러나 두 세기가 흐르면서 교회는 다시 제도와 조직 중심으로 안정되어 갔다. 신앙은 교리와 질서를 중시했지만, 일반 민중의 삶과는 점차 거리가 생겨났다. 바로 이러한 시대에 종교를 다시 삶의 현장으로 끌어낸 인물이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John Wesley)이다. 그는 처음부터 감리교를 만들려 했던 사람은 아니었다. 성공회 내부의 영적 갱신 운동을 이끌었던 성직자였다.

 

그는 1703년 영국 잉글랜드 링컨셔의 작은 마을 에프워스(Epworth)에서 태어났다. 성공회 성직자였던 부친의 영향으로 옥스퍼드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성공회는 16세기 영국이 로마 가톨릭교회와 결별하면서 세운 국가교회다. 예배 전통은 가톨릭의 요소를 많이 유지했지만, 교황의 권위는 인정하지 않는 독자적인 교회였다. 웨슬리는 바로 이 성공회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목회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성공회 성직자가 된 웨슬리는 매우 엄격한 신앙 훈련 속에서 자랐다. 그는 철저한 도덕적 규율과 경건한 생활을 중시했으며, 누구보다 성실한 신앙인이 되고자 노력했다.

2009년 제작된 전기영화 ‘웨슬리: 변화된 한 마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포스터. 이 영화는 존 웨슬리의 영적 방황과 올더스게이트 체험, 그리고 감리교 운동의 시작을 그렸다. 출처: 영화 ‘Wesley’ 공식 포스터
2009년 제작된 전기영화 ‘웨슬리: 변화된 한 마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포스터. 이 영화는 존 웨슬리의 영적 방황과 올더스게이트 체험, 그리고 감리교 운동의 시작을 그렸다. 출처: 영화 ‘Wesley’ 공식 포스터

◆올더스게이트, 마음이 뜨거워진 그날

 

그러나 그의 초기 사역은 실패와 혼란으로 가득했다. 아메리카 선교도 기대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무엇보다 신앙적으로 깊은 불안을 경험했다. 성직자였지만 정작 자신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신뢰하고 있는지 확신하지 못했던 것이다. 웨슬리는 옥스퍼드에서 동생 찰스 웨슬리 등과 함께 작지만 경건한 모임을 만들었다. 이 모임의 특징은 성경 공부와 금식, 기도, 철저한 생활 규율이었다. 이들이 매우 규칙적(methodical)으로 생활하자 주변 사람들은 조롱 섞인 말로 이들을 “메소디스트(Methodist)”라고 불렀다. 훗날 감리교(Methodism)라는 이름은 여기서 유래했다.

 

웨슬리의 삶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은 1738년 런던 올더스게이트 거리(Aldersgate Street)에 있는 한 모임에 참석했을 때다. 당시 그는 이미 성공회 성직자였으나 신앙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다. 열심히 기도하고 선교도 했지만, 정작 자신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는 평안을 얻지 못했다. 그날 모임에서 누군가가 마르틴 루터가 쓴 로마서 서문 해설을 읽고 있었는데, 그 내용을 듣던 중 웨슬리는 강렬한 영적 체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약 8시 45분경,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속에서 행하시는 변화를 설명하는 부분을 듣고 있을 때, 나는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 경험은 그의 신앙 이해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 순간 하나님이 자신을 받아들이고 용서하셨다는 깊은 내적 확신을 얻은 것이다. 그동안 머리로 알던 신앙이 가슴으로 내려오는 순간이었다. 이후 그는 신앙을 하나님 은혜를 직접 경험하는 사건으로 이해하게 된다. 설교도 크게 달라졌다. 믿음은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었으며,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직접 임할 수 있다는 확신이 그의 메시지의 중심이 되었다.

 

웨슬리의 삶에는 어린 시절부터 특별한 경험이 있었다. 다섯 살이던 1709년, 에프워스의 목사관에 큰 화재가 발생했다. 가족들은 가까스로 대피했지만, 웨슬리만 집 안에 갇혔다. 불길이 지붕까지 번진 마지막 순간, 이웃들이 사람사다리를 만들어 창문을 통해 그를 구해냈다. 웨슬리는 평생 자신을 성경 스가랴서의 표현을 빌려 “불 속에서 꺼내진 그을린 나무 한 토막(a brand plucked from the burning)”이라고 불렀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특별한 사명을 위해 살려 두셨다고 믿었으며, 이러한 소명 의식은 평생 거리와 광산, 노동 현장을 누비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교회의 담장을 넘어 거리로

 

웨슬리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현장성’이다. 당시 교회는 대부분 성당 중심으로 운영되었지만, 웨슬리는 직접 거리로 나가 설교를 시작했다. 18세기 영국은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거대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농촌 인구가 도시와 광산으로 몰려들었고, 수많은 노동자가 열악한 환경에서 긴 노동과 가난에 시달렸다. 그러나 기존 교회는 이러한 사회 변화에 충분히 대응하지 못했다. 바로 이 시대적 틈새에서 웨슬리는 교회 안에서 기다리기보다 사람들의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간 것이다. 탄광촌과 공장 지대, 노동자 밀집 지역 등을 찾아가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는데,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 방식이었다.

 

웨슬리의 가장 유명한 선언은 “세상이 나의 교구다(The world is my parish)”이다. 이 한 문장은 그의 신학과 실천을 가장 잘 보여준다. 여기서 교구란 목회하는 구역을 뜻한다. 웨슬리는 이 세상 모든 곳을 자신의 사역 현장으로 본 것이다. 당시 성공회 성직자는 자신에게 맡겨진 교구 안에서만 활동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웨슬리는 교회의 경계를 넘어섰다. 거리와 광장, 광산과 노동자 마을까지 모든 곳을 설교의 자리로 보았다.

 

1739년 이후 그는 본격적으로 야외 설교를 시작했다. 광산 노동자들이 일을 마치고 모여드는 언덕에서 수천 명을 상대로 설교했고, 교회가 아닌 삶의 현장에서 복음을 전했다. 그는 사람들이 교회에 오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오히려 직접 사람들에게 찾아갔다. 웨슬리는 평생 대부분을 말을 타고 다니며 설교했다. 평생 4만 회가 넘는 설교를 했고, 이동 거리는 지구를 여러 바퀴 돌 수 있을 만큼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그의 삶 자체가 ‘찾아가는 목회’였다.

 

웨슬리 운동의 또 다른 특징은 소그룹 공동체였다. 그는 많은 사람이 한데 모이면 신앙이 쉽게 흐트러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10~12명 단위의 소규모 모임을 만들고 정기적으로 신앙을 점검하며 삶을 나누도록 했다. 오늘날 교회의 소그룹 또는 셀 모임은 여기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또한 그는 이동 설교자 제도를 적극 활용했다. 설교자들은 말을 타고 농촌과 도시, 광산 지역을 순회하며 같은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전했다. 이 체계적인 조직은 감리교가 급속히 확산되는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웨슬리는 신앙을 종교적 열정으로만 보지 않았다. 신앙에 앞서 절제와 노동 윤리,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강조한 것이다. 이것은 금주(禁酒) 운동과 사회 개혁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는 신앙이 삶 속에서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감리교는 단순한 종교 운동을 넘어 생활 윤리 운동의 성격도 강하게 띠게 되었다.

 

하지만 초기부터 모든 사람이 웨슬리를 환영한 것은 아니다. 성공회 내부에서는 “교회 밖 설교는 질서 위반”이라거나 “개인 체험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감정주의로 흐를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설교가 금지되거나 성직자들의 배척을 받기도 했다.

 

반면 탄광 노동자와 도시 빈민들은 웨슬리의 설교에 뜨겁게 호응했다. 기존 교회가 충분히 돌보지 못했던 이들에게 그는 “당신의 삶 역시 하나님의 관심 속에 있다”는 복음을 전했고, 그 메시지는 그들의 마음을 깊이 움직였다. 그래서 감리교는 처음부터 노동자와 빈민층을 중심으로 성장하는 민중 종교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삶을 바꾼 실천의 영성

 

웨슬리 운동은 때때로 많은 핍박을 받았다. 설교 현장에서는 야유와 방해를 받았고 돌이 날아드는 일도 적지 않았다. 지역 성직자들의 반발과 도시 출입 제한도 이어졌다. 초기 감리교는 결코 조용한 개혁 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배척과 갈등 속에서 확산된 대중 운동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동은 계속 성장했다. 신앙을 직접 경험할 수 있다는 메시지, 교회에 가지 않아도 복음을 들을 수 있다는 접근성, 그리고 산업혁명 초기 도시 빈민이 급증하는 사회적 변화가 맞물렸기 때문이다. 마침내 감리교 운동은 성공회 내부의 경건 운동을 넘어 하나의 독립된 교단으로 발전하게 된다. 감리교는 개인적 회심 경험, 성경 중심 신앙, 규율 있는 생활,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을 중요한 특징으로 삼는다. 즉, 신앙을 개인 내부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삶 전체로 확장하려는 운동이었다.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은 처음에는 비정통 운동으로 비판받았지만, 노동자와 빈민층의 폭넓은 지지를 받으며 결국 영국 사회를 변화시키는 대중 종교 운동으로 성장했다. 중세 이후 종교가 제도와 교회 중심으로 흘러갔다면, 웨슬리 이후 종교는 개인의 경험과 삶의 현장 속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되었다. 웨슬리 운동은 사회 변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노동자 계층의 신앙 형성과 교육 및 문해력 향상, 금주 운동과 도덕 개혁, 사회 복지 운동의 발전에도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웨슬리에게 신앙은 교리의 이해에서 멈추지 않고 삶의 실천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이었다. “할 수 있는 모든 선을,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베풀라.” 그의 실천 영성이 잘 드러나는 말이다. 한마디로 존 웨슬리는 종교를 성당 안의 제도에서 끌어내어 거리와 노동 현장 속으로 가져간 인물이었다. 그에게 신앙은 삶 속에서 경험되는 은혜였으며, 사람들을 향해 먼저 다가가는 사명이었다. “온 세상이 나의 교구다.” 그의 외침은 오늘날에도 신앙인이 서 있어야 할 자리를 선명하게 비추고 있다.

 

[인류는 왜 영성을 찾는가—세계사를 움직인 15인의 영성] 목차

 

<1> 모세-“노예 민족에게 법과 신을 준 사람”

<2> 공자-“혼란한 시대, 인간의 질서를 묻다”

<3> 노자-“세상을 거슬러 흐르지 말라”

<4> 석가모니-“인간의 고통을 정면으로 바라본 사람”

<5> 조로아스터-“선과 악의 전쟁은 어디서 시작됐는가”

<6> 예수-“사랑은 어떻게 세계를 바꾸었는가”

<7> 무함마드-“신앙은 공동체를 어떻게 조직하는가”

<8> 성 아우구스티누스-“인간 내면에도 제국은 존재한다”

<9> 토마스 아퀴나스-“신과 이성은 화해할 수 있는가”

<10> 마르틴 루터-“양심은 교황보다 강한가”

<11> 존 웨슬리-“대중 속으로 들어간 종교”

<12> 라마크리슈나-“모든 종교는 같은 산을 오르는가”

<13> 달라이 라마 14세-“인간은 증오 없이 저항할 수 있는가”

<14> 문선명·한학자-분열된 인류는 다시 한 가족이 될 수 있는가

<15> 간디-“정치는 영혼을 가질 수 있는가”


오피니언

포토

선미, 핑크 메이크업에 금발까지
  • 선미, 핑크 메이크업에 금발까지
  • 강예원, 20대 같은 동안 미모
  • 아이들 미연, 여신 미모에 섹시미까지 장착…글래머 몸매
  • 문가영, 휴대폰 속 얼굴 옆에서도 굴욕 없는 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