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는 한국과 인연이 깊다. 다수 한국인은 ‘하비에르 페레스 데 케야르’라는 이름에 익숙할 것이다. 1920년생으로 주(駐)유엔 페루 대사를 거쳐 1982년 1월부터 1991년 12월까지 10년간 유엔 사무총장을 지낸 인물이다. 케야르가 유엔을 이끌던 1991년 9월17일 한국과 북한이 나란히 유엔 가입을 실현했다. 당시 강석주 북한 외교부 부부장은 유엔 회원국 지위 수락 연설에서 “비록 북과 남이 따로 유엔에 들어왔지만 (…) 하나의 의석을 차지하게 될 날이 꼭 오리라는 것을 우리는 확신한다”고 말했다. 오늘날 북한이 “남북은 적대적 두 국가”라는 주장을 펼치는 점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든다.
2024년 11월 당시 윤석열 대통령이 페루 리마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이펙) 정상회의에 참석했을 때의 일이다. 행사 마지막 날 에이펙 의장국 페루의 디나 볼루아르테 대통령이 윤 대통령에게 페루 전통 양식으로 만든 의사봉을 전달했다. 아듬해인 2025년 에이펙 정상회의가 한국 경주에서 열리는 점을 감안해 차기 의장국인 한국의 성공적 회의 개최를 기원하는 뜻이 담겼다. 그런데 이후 윤 대통령은 12·3 비상계엄 사태로, 볼루아르테 대통령은 부정부패 혐의로 둘 다 국회 탄핵소추를 당해 파면됐다. 호사가들 사이에 ‘페루 의사봉의 저주’란 말이 나온 것도 무리는 아니다.
볼루아르테의 경우 원래 부통령이었는데 전임 대통령이 국회 탄핵으로 축출되며 2022년 12월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그런데 2024년 3월 볼루아르테가 고가의 시계와 보석을 소유한 사실이 드러났다. 볼루아르테는 “내가 번 돈으로 정당하게 산 것”이란 주장을 폈으나 국민은 고개를 돌렸다. 결국 볼루아르테는 취임 후 채 3년도 채우지 못하고 2025년 10월 쫓겨났다. 국회 탄핵 후에도 헌법재판소의 심판을 거치도록 한 한국과 달리 페루는 국회가 탄핵소추안을 가결하면 그것으로 탄핵의 효력이 발생한다. 페루 국회의 재적 의원 130명 중 3분의 2(87명) 이상이 찬성하면 대통령은 곧장 파면된다.
그래서일까. 페루는 2011년 취임한 군인 출신 오얀타 우말라 대통령이 5년 임기를 마치고 2016년 7월 퇴임한 뒤로 단명(短命) 대통령이 속출했다. 우말라까지 포함하면 지난 10년간 무려 9명의 대통령이 페루 정부를 이끌었다. 호세 마리아 발카사르 현 대통령도 올해 2월 탄핵을 당한 전임자를 대신해 그 자리에 올랐다. 최근 새 대통령 선출을 위한 선거가 실시된 가운데 우파 게이코 후지모리(51) 후보와 좌파 로베르토 산체스(57) 후보가 백중지세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누가 당선되든 2016년 이후 10번째 대통령에 해당한다. 무엇보다도 정치 안정을 위한 제도 개혁이 가장 시급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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