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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두 겹, 그리고 보이지 않는 손 [종교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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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수 종교전문기자 hulk1983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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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흔히 거대한 의지와 선택의 기록으로 읽힌다. 지도자의 결단과 대중의 움직임이 충돌하고 융합하며 만들어내는 파동을 우리는 ‘인간의 역사’라 정의한다. 그러나 그 파동을 좀 더 긴 안목으로 들여다보면, 인간의 계획을 넘어서는 기묘한 수렴의 순간들을 마주하게 된다. 전혀 다른 궤적을 그리던 인물들이 특정 시공간에서 만나 하나의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장면들이다.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과 문선명 총재, 그 막후에서 가교역할을 했던 이들의 이야기는 역사가 우연의 산물이 아님을 시사한다.

 

김대중의 생애는 그 자체로 고난의 집약체였다. 납치와 사형 선고, 망명과 좌절로 점철된 그의 삶은 당시의 시선으로는 패배와 불운의 연속으로 보였다. 하지만 박중현 전 통일교 북미대륙 회장의 회고는 이 이야기에 전혀 다른 관점을 부여한다. 그는 자신의 자전적 기록을 통해 문선명 총재가 이미 젊은 시절 김대중의 정치적 고난을 예견했음을 밝혔다. 이는 예언 차원을 넘어 한 인물이 겪는 시련이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어떤 ‘필연성’을 담보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실제로 1980년대 초, 신군부의 압박 속에 생사의 기로에 섰던 김대중의 운명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움직인 손길들에 의해 전환점을 맞이한다. 1981년 레이건 행정부 출범 직전, 박보희 당시 미국 뉴스월드 사장은 전두환 신군부 실세들과 접촉하며 김대중의 석방 및 미국 망명을 조율했다. 당시 국내에서는 언론에서 김대중의 이름조차 언급하기 어려웠던 엄혹한 시절, 미국 내 통일교 매체인 미주 세계일보만이 이 소식을 대서특필했던 점은 세간이 알지 못했던 두 세력 사이의 암묵적 교감을 보여준다.

 

반공을 기치로 내건 종교 지도자와 민주화 운동의 상징인 정치인, 이 두 사람은 겉보기에 결코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 같았다. 그러나 1983년 워싱턴타임스를 방문한 김대중은 유창한 영어로 “나는 통일교를 한 번도 부정적으로 본 적이 없으며, 경이로움(amazing)으로 바라보았다”고 밝혔다. 이는 의례적 수사만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고난을 걷어낸 힘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민주화와 세계 평화라는 더 큰 가치를 위해 종교적 기반과 손을 잡는 실존적 결단에서였다.

정성수 종교전문기자
정성수 종교전문기자

이러한 인연으로 훗날 김대중이 제1야당인 평화민주당 총재 시절 1989년 세계일보 창간 리셉션에 참석해 문선명·한학자 총재를 만났고, 마침내 15대 대통령이 돼서도 1999년 세계일보 창간 10주년 기념식을 찾아 두 사람과 재회했다. 이후 문 총재를 청와대로 초청해 만남을 이어간 것은 고난의 시절에 맺어진 깊은 신뢰와 존중의 표현이었다. 서로 다른 길을 걷던 두 인물이 한반도 평화라는 지점에서 조우한 것은 역사가 인간의 이념적 대립을 넘어서는 어떤 질서에 의해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신앙의 관점에서 이 과정을 설명한다면 그것은 바로 ‘섭리’다. 인간은 현재의 고통과 실패를 단절된 사건으로 보지만, 신앙은 시간을 관통하는 흐름 속에서 그 의미를 찾는다. 김대중이 겪은 숱한 우회와 지연은 결국 한국 최초의 노벨평화상 수상과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라는 완성을 향한 필수적인 준비 과정이었다. 박중현 회장의 기록에 따르면, 2010년 문선명 총재 내외가 주재한 ‘세계 평화지도자 8명의 성화식(죽음이 아닌 영계에서의 새로운 탄생을 의미하는 의식)’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포함돼 추모된 것은 지상에서의 인연이 영적인 서사로까지 이어졌음을 상징한다.

 

결국 역사는 두 겹으로 쓰여진다. 하나는 인간이 눈앞의 이해관계로 기록하는 일차적인 역사이고, 다른 하나는 그 배후에서 조용히 길을 내는 보이지 않는 역사다. 우리는 종종 전자의 소란함에 매몰되어 후자의 침묵을 잊고 살아간다. 하지만 긴 시간이 흐른 뒤 뒤를 돌아볼 때, 비로소 깨닫게 된다. 도저히 연결될 것 같지 않던 점들이 모여 하나의 선을 이루고 있었고, 우리가 걸어온 길이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었음을. 하늘이 쓰는 역사의 방식은 요란하지 않다. 그것은 때로 시련의 탈을 쓰고 오며, 때로는 예상치 못한 타인의 손길을 빌려온다. 지금 누군가가 겪고 있는 고난과 앞으로 마주할 인연들 또한 거대한 역사의 완성을 향한 소중한 필치다. 우리는 그 침묵의 흐름을 믿으며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역사의 한 페이지를 묵묵히 채워 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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