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는 흔히 성격 문제로 치부된다.
하지만 의학계는 분노를 더 이상 개인의 인내심이나 태도의 문제로 보지 않는다. 조절되지 않은 분노는 뇌 기능과 신체 건강을 동시에 위협하는 명확한 건강 위험 요인이라는데 전문가들의 의견이 모인다.
◆성인 절반 이상, 장기적 ‘울분’ 상태
24일 의료계에 따르면 화를 자주 내는 것도 문제지만, 무조건 참는 것도 안전하지 않다.
분노가 반복되거나 장기화되면 스트레스 호르몬 분비가 과도해지기 때문.
기억과 학습을 담당하는 뇌 해마를 손상시켜 인지기능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
서울대 보건대학원이 발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한국 성인의 55% 이상이 장기적인 울분, 이른바 ‘화병’ 상태에 놓여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12.8%는 심각한 수준을 겪고 있었다.
특징적인 점은 화병이 더 이상 중·장년층 여성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쟁 심화된 사회 구조 △불공정에 대한 인식 △미래 불안이 맞물리면서 20~30대 젊은 층에서도 분노 관련 증상이 빠르게 늘고 있다.
개인의 성향보다 사회적 원인에 의해 촉발된 분노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분석이다.
◆분노는 하나의 ‘질환 스펙트럼’
한 연구에 따르면 화를 자주 참는 사람은 사망 위험이 3.5배 높아지는 것으로 집계됐다.
화를 자주 참으면 스트레스 호르몬이 뇌에 악영향을 미쳐 인지기능 저하와 건강 악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의학적으로 분노는 다양한 질환과 연결된다. △간헐적 폭발장애 △외상후 울분장애 △성인 ADHD △화병 등이 대표적이다.
공통점은 의지가 약해서가 아닌 뇌의 감정 조절 회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상태라는 점이다.
◆전문가들 “의지 아닌 ‘뇌 기능’의 문제”
한 정신의학과 전문의는 “분노는 무조건 억누르거나 폭발시킬 대상이 아닌 조절하고 해석해야 할 신호”라며 “조절되지 않은 분노는 심혈관 질환과 인지기능 저하 위험을 동시에 높인다”고 설명한다.
이어 “화를 자주 내는 사람뿐 아니라 늘 참는 사람도 모두 고위험군”이라고 덧붙였다.
뇌과학적으로 보면 분노 조절은 전전두엽과 변연계의 협업 결과다. 이 연결이 약해지면 충동적 반응이 앞서게 된다.
신경과 전문의는 “분노 조절은 마음가짐이 아니라 뇌 기능의 문제”라며 “스트레스 호르몬은 해마를 직접 손상시켜, 분노가 잦을수록 기억력과 집중력이 떨어질 가능성이 커진다”고 말한다.
성인 ADHD 환자의 분노 폭발은 성격과 무관하다. 신경전달물질의 불균형에서 비롯된 증상으로, 적절한 치료 없이는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
◆‘멈추는 연습’이 치료의 시작
화를 자주, 강하게 내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첫 단계는 행동을 즉시 멈추는 연습이다.
분노가 치밀 때 스스로에게 ‘멈춰’라는 신호를 보내고, 깊은 호흡으로 반응을 지연시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분노를 느끼는 순간 멈추는 연습은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닌 뇌에 새로운 반응 경로를 학습시키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 충동 반응의 강도와 빈도가 점차 낮아진다.
◆“억눌린 분노,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화병은 분노를 표현하지 못한 결과로 나타나는 심리·신체 통합 증상이다.
외상후 울분장애의 경우 상실과 부당함을 소화하지 못한 감정이 분노로 굳어진 상태다.
전문가들은 “억눌린 분노는 사라지지 않고 신체 증상으로 이동한다”고 지적한다.
가슴 답답함, 두통, 소화불량, 불면 등이 대표적이다.
이 경우에는 감정을 안전하게 풀어내는 과정이 필수다. 운동은 가장 안전한 공격성 배출 통로로 꼽힌다.
◆“혼자 버틸 문제 아냐…분노 관리, 생존 기술이 되다”
자기 조절이 반복적으로 실패한다면, 더 이상 개인의 노력만으로 해결할 사안이 아니다.
약물치료와 인지행동치료는 감정을 무디게 만드는 것이 아닌 통제력을 회복시키는 치료다.
한 전문의는 “아무리 노력해도 분노가 조절되지 않는다면 성격 문제가 아닌 질환일 가능성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며 “분노 문제를 치료받는 것은 약함이 아닌 가장 적극적인 자기관리”라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화를 내도 문제, 참아도 문제라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라며 “분노 관리 능력은 마음의 예의가 아닌 생존 기술에 가깝다. 화를 다스리는 것은 성격을 고치는 일이 아닌 뇌를 훈련하는 과정”이라고 입을 모은다.
분노는 누구에게나 생긴다. 중요한 것은 없애는 것이 아닌 관리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관리되지 않은 분노는 결국 질병이 되지만, 관리된 분노는 자신을 지키는 신호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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