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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김성도, 성서의 비밀을 받다 [역사와 신학에서 본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 –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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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12-23 16:43:41 수정 : 2025-12-23 16:4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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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봄, 평안북도 철산

 

한낮의 햇살이 쏟아지던 철산군 장좌동. 방 안에 홀로 앉은 여신도 김성도는 몇 달째 하나의 질문에 사로잡혀 있었다. 

 

“죄란 무엇입니까? 왜 인간은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까?”

 

‘김성도 부인’. 일제시대 평안북도 철산에서 ‘새주님’으로 불린 인물로, 여성 메시아사상의 중심에 있었다.

물음의 시작은 담임 목사의 추문이었다. 예수의 십자가로 죄가 씻겼다는데, 왜 사람들은 여전히 죄를 짓는가. 왜 목회자조차 그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한가. 교리와 현실 사이의 간극은 그녀를 잠들지 못하게 했다. 신앙적인 모순 앞에서, 김성도는 답을 하늘에 물을 수밖에 없었다.

 

음력 4월 12일 정오, 깊은 기도 가운데 하늘이 열렸다. 김성도는 떨리는 손으로 계시를 받아 적었다. 길이 2m, 폭 30㎝의 종이 열두 장. 그 안에는 원죄의 뿌리, 예수의 십자가, 그리고 재림에 대한 전혀 새로운 이해가 담겨 있었다. 훗날 1930년대 한반도를 뒤흔든 신령운동은 이렇게 조용한 방 안에서 시작되었다.

 

하늘이 알려준 성서의 비밀

 

계시는 충격이었다. “죄의 뿌리는 선악과라는 과일이 아니다. 남녀 간의 잘못된 사랑이 원죄의 뿌리다.” 2000년 동안 상징으로 이해되어 온 이야기를, 계시는 실체로 풀어 주었다. 아담과 해와가 때가 되기 전에 사랑의 법도를 어긴 것, 그것이 인류 고통의 시작이라는 것. 이 계시는 교리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존재와 역사 전체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선언과도 같았다.

 

두 번째 계시는 더욱 파격적이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본래 뜻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참된 결혼으로 새 혈통을 세우기 위해 오셨다.” 정통 기독교의 기준으로는 이단적인 생각이지만, 김성도에게는 예수 생애의 수수께끼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가나 혼인잔치에서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요한복음 2장 4절)던 말씀이 이해되었다. 신부 없이 홀로 돌아가신 예수님의 한이 보였다.

 

세 번째 계시는 절망의 시대에 던져진 희망이었다. “재림주님은 구름을 타고 오시지 않는다. 여인의 몸을 통해 오시며, 그 땅은 한국이다.” 일제의 압박 아래 신음하던 민족에게, 이는 역사의 방향을 새롭게 제시하는 선언이었다.

 

가장 핵심적인 계시는 마태복음 5장 48절이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담임 목사는 이를 도달 불가능한 이상으로 여겼지만, 김성도는 달랐다. 기독교 역사 속 구도자들처럼, 그녀는 완전함을 실제로 살아내야 할 부르심으로 받아들였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길은 말씀이 아니라 삶이어야 했다. 그 지점에서 기성교회와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

 

◆철산에서 피어난 경건의 불꽃

 

1925년, 김성도는 장로교단으로부터 책벌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김성도는 자택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시골 아낙처럼 보였지만 기도는 신령했고 설교에는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중세 힐데가르트가 영능으로 사람들을 끌어 모았듯, 김성도 역시 신령한 능력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사람들의 심정을 꿰뚫었다. 병든 자들을 기도로 고쳤고, 등창 환자의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300석 부자였지만 창고에 멍석을 깔고 그들과 함께 잠을 잤다. 떠나는 이들에게는 여비까지 주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새주님’이라 불렀다.

 

금욕은 철저했다. 온전함에 이르기 위해서는 음란의 뿌리를 끊어야 한다고 믿었다. 고기를 끊고, 쌀을 불려 생식하며, 기혼 부부에게도 절제를 요구했다. 그것은 단순한 금욕이 아니라, 재림을 기다리는 신부의 자세였다. 

 

◆성주교단의 설립과 사명의 계승

 

1932년 무렵, 백남주 목사가 철산으로 와 집회를 인도하면서 교류가 시작되었다. 1933년 새주파는 예수교회에 합류했으나, 이용도의 죽음 이후 포용력을 잃은 예수교회는 새주신앙과 죄씻음 의식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1935년 봄, 새주파는 출원당했다.

 

백남주가 제자 김백문과 함께 철산으로 왔다. 힐데가르트에게 폴마르가 있었듯, 김성도에게는 백남주가 있었다. 그의 도움으로 새주파는 1937년 2월 총독부에 ‘성주교단’으로 공식 등록되었고, 전국 20여 곳에 집회소가 세워졌다. 1940년경 신도는 약 1,000명에 이르렀다.

 

성주교단을 중심한 하늘의 섭리는 여성이 영적 주체로 서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성도의 남편은 이 사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명은 자녀 세대로 넘어갔다. 장남 부부에게서도 시련이 이어졌다. 며느리는 깊은 영적 고통 끝에 1941년 세상을 떠났다. 결국 사명은 평양의 허호빈 부부에게로 넘겨졌다.

 

◆민족 말살의 암흑기, 재림을 준비하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거치며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은 극에 달했다. 창씨개명, 신사참배, 기독교 탄압. 재림 사상은 천황 중심의 국체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재림을 믿던 교회들은 차례로 해산되거나 무너졌다. 이 암흑 속에서 신령집단의 기도는 더욱 간절해졌다. 극한의 시대는 극단의 영성을 낳았다.

 

“일본은 망하고, 한국은 새주님을 중심으로 세계 1등국이 된다.” 이 설교로 인해 1943년 가을, 김성도와 핵심 신도들이 체포되었다. 혹독한 고문 끝에, 김성도는 1944년 4월 1일, 62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계시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사명은 허호빈을 거쳐 홍순애에게로 이어졌고, 여성 신령집단의 영성은 독생녀 탄생의 영적 기반이 되었다. 공중 재림을 바라보던 시대에, 김성도를 중심한 한국의 여성 신령집단은 육신을 입고 오시는 메시아를 준비했다. 이들은 여인의 몸을 통해 오실 재림주를 위해 금욕과 정성으로 신부의 자격을 갖추었다. 하늘은 한반도에, 2천 년 기독교 역사의 열매를 준비하고 계셨다.

 

양순석 역사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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