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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김일성 사망 31주기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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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7-02 15:52:46 수정 : 2025-07-02 15:5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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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이후 첫 남북 정상회담의 주역은 김영삼(YS) 대통령과 김일성 북한 주석이 될 뻔했다. 1994년 6월 남북은 그해 7월25일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갖기로 전격 합의했다. 회담에 앞서 7월1일 판문점에서 열린 실무 대표 접촉에선 아주 구체적인 방안까지 논의됐다. YS와 김일성이 배석자 없이 최소 두 차례 단독 회담을 갖는다는 내용이 대표적이다. 물론 갈등도 있었다. 한국은 현장 생중계를 위한 방송 차량 및 요원의 파견을 요청했다. 반면 북한은 녹화 후 며칠 뒤에 보도하면 되지 굳이 생방송을 해야 하느냐며 어깃장을 놓았다.

 

1994년 7월9일 서울역 앞 광장에서 시민들이 김일성 북한 주석의 사망을 알리는 세계일보 호외 신문을 읽고 있다. 북한 매체는 김일성 사망 후 하루가 지난 뒤에야 이를 보도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남북 정상회담 개최라는 아이디어는 어디서, 어떻게 나왔을까. 이를 이해하려면 1993년 3월 북한의 돌발적인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북한이 핵무기 개발에 착수했다는 것은 1990년대 초반 이미 알려진 사실이었다. 냉전 종식과 소련(현 러시아) 해체를 계기로 북한을 비롯한 전 세계 공산주의 국가들의 운명이 암울해진 때였다. 김일성은 북한에서도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나 권력을 잃을까봐 걱정했다. 이미 남북 체제 경쟁에서 완패한 북한이 살아 남으려면 핵무기가 꼭 필요했을 것이다.

 

당시 미국은 민주당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이었다. 대북 강경파는 공습을 통한 북한 핵 시설 초토화를 주장했다. 얼마 전 미 공군이 B2 스텔스 폭격기 등을 동원해 이란 핵 시설을 파괴한 것처럼 말이다. 진보 성향의 클린턴 대통령은 주저했다. 그러는 사이 같은 민주당 소속인 지미 카터 전 대통령(1977년 1월∼1981년 1월 재임)이 1994년 6월15일 특사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했다. 이후 카터는 “긴장 완화를 위해 핵무기 개발 동결이 가능하며 남북 정상회담 개최도 희망한다”는 김일성의 제안을 받아들고 판문점을 거쳐 한국에 왔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에 미국이 제동을 걸고 나서며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던 1994년 6월 평양을 방문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왼쪽)이 대동강을 운항하는 유람선 위에서 김일성 당시 북한 주석과 대화하고 있다. 두 사람의 회동에서 남북 정상회담 개최 합의가 이뤄졌으나 김일성이 회담을 불과 17일 앞두고 심근경색으로 사망하며 불발에 그쳤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오는 8일은 김일성이 82세를 일기로 사망한 지 31년이 되는 날이다. 분단 이후 첫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불과 17일 앞둔 1994년 7월8일 심근경색으로 숨진 것이다. 남북 관계 개선을 원하지 않는 북한 군부의 보수 세력이 획책한 암살의 결과라는 등 온갖 억측이 난무했다. 김일성은 비록 6·25 전쟁을 일으킨 전범이었으나 남북 관계에 대해선 ‘나라 대 나라가 아니고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 관계’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하지만 그 손자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남북을 “교전 중인 두 국가”로 규정하고 한국을 적대시하니 한숨만 나올 뿐이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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