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 시라쿠사 고고학공원 들어서면 고대로 시간여행/돌산 깎아 만든 그리스 극장 빼어난 건축 솜씨에 탄성/아그리젠토 ‘신전의 계곡’ 그리스보다 더 그리스 같아/유네스코 로고 콩코르디아 신전 원형 완벽 본존/계단 모양 스칼라 데이 투르키 오르면 아름다운 석회암 절벽 파노라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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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뜩 성난 이를 어루만지듯 활처럼 휘어지며 부드럽게 바다를 감싸안는 거대한 절벽. 그 끝에 바다를 향해 흘러내린 ‘석회암 계단’은 푸른 지중해에 반사된 햇살을 고스란히 받아 눈이 부시도록 반짝인다. 마치 온화한 미소를 지닌 여인이 드리운 우아한 하얀 드레스 자락처럼. ‘시칠리아의 보석’ 스칼라 데이 투르키. 바닷물이 발길에 닿을 듯 말 듯 오가는 해안길을 타박타박 걸어 솜씨 좋은 신이 억겁의 세월 동안 거친 바람과 파도로 조각한 걸작 위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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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세상 그리스 극장
고대 그리스인들이 기원전 8세기부터 식민도시국가를 건설한 이탈리아 시칠리아에는 많은 그리스 유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대표 도시가 시라쿠사와 아그리젠토. 시라쿠사에는 북쪽 네아폴리스 고고학공원에 유적들이 몰려 있다. 네아폴리스는 그리스어로 ‘새로운 도시’란 뜻. 그리스인들은 이탈리아 여러 지역에 네아폴리스를 구축했는데 나폴리란 지명도 네아폴리스에서 유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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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공원 매표소를 통과하자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이카로스를 소재로 다양한 청동 조각상을 선보인 폴란드 작가 이고르 미토라이의 작품들이 놓여 고대의 시간으로 이끈다. 여행자를 처음 반기는 아름다운 절벽은 라토미에 델 파라디소로 ‘천국의 채석장’이란 뜻이다. 고고학공원은 원래 그리스인의 채석장이었다. 깎아지른 석회암 절벽이 병풍처럼 공원을 에워싼 모습이 마치 신들의 세상에 들어선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이런 이름이 붙었다. 절벽 밑으로 조경이 빼어난 정원이 꾸며져 머리를 식히며 걷기 좋다. 산책로에 줄지어 선 나무에는 탐스러운 오렌지가 주렁주렁 달려 지날 때마다 향긋한 풍미를 선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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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깊숙하게 들어서면 신기한 모양의 동굴 ‘디오니시우스의 귀’가 등장한다. 가까이서 보니 영락없는 사람의 귀 모양이다. 디오니시우스는 시라쿠사의 폭군. 정치범 등 죄수들을 이곳에 가둔 그가 작은 구멍으로 죄수들의 말을 엿듣기 위해 동굴을 만들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실제 석회암을 파서 만든 인공 동굴은 높이 23m, 폭 8~11m, 깊이 65m로 거대하다. 특히 소리가 최대 16배까지 증폭돼 속삭이는 소리까지 잘 들린다. 이런 음향 특징과 귀 모양을 닮은 독특한 형태를 본 당대 최고의 화가 카라바조가 상상력을 동원해 ‘디오니시우스의 귀’라는 이름을 붙였다. 좀 겁이 나더라도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동굴 끝까지 꼭 들어가 보길. 눈이 어둠에 적응될 때쯤 코앞에 선 거대한 얼굴 조각 때문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역시 미토라이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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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발길을 출입구 쪽으로 돌려 오른쪽 길로 접어들면 입이 쩍 벌어지는 그리스 극장이 등장한다. 기원전 5세기에 지은 극장은 1만5000명을 수용할 정도로 규모가 웅장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계단식 객석을 만든 방법이다. 시칠리아 타오르미나 고대 극장의 객석은 돌을 한 층씩 쌓아 올려 만들었지만 이곳은 거대한 돌산을 조각하듯 파내서 만들었다. 매우 정교한 고대 그리스인의 건축 솜씨와 스케일이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근처에는 로마 콜로세움처럼 검투사의 혈투와 공공행사가 열리던 로마 원형극장도 있다. 그리스 극장보다 나중에 지었지만 객석을 돌로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만들어 원형이 많이 훼손됐다. 히에론 2세의 제단도 엄청나다. 거대한 바위 하나를 통째로 깎아서 만든 하얀 석회암 제단은 길이 196m로 한번에 동물 450마리를 희생 제물로 바칠 수 있었다고 한다. 기원전 3세기 시라쿠사의 왕 히에론 2세는 건축과 예술을 후원했고 통치기간 시라쿠사는 큰 번영을 누렸다. 종교적 중심지이자 왕의 권력을 상징하던 제단은 16세기 스페인 침략자들이 요새 건축용으로 돌덩이를 약탈하면서 지금은 제단 바닥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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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세상 아그리젠토
볼 것 많아 정든 시라쿠사를 떠나 서쪽으로 쉬지 않고 2시간30분가량 달리면 시칠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리스 유적, 아그리젠토에 닿는다. 긴 계곡을 따라 여러 신전이 한 줄로 늘어서 있어 ‘신전의 계곡’이라 부른다. 서쪽 디오스쿠리 신전과 동쪽 헤라 신전 두 곳에 매표소가 자리해 어디로든 들어갈 수 있다. 디오스쿠리는 ‘신들의 신’ 제우스의 쌍둥이 아들 카스토르와 폴룩스를 말한다. 스파르타의 왕비 레다는 백조로 변신한 제우스에 반해 쌍둥이 아들을 낳았다. 원래 신전 기둥이 6개씩 13줄이나 있었다. 하지만 기원전 480~306년 카르타고와 벌인 7차례 시칠리아 전쟁 등을 거치면서 파괴돼 달랑 모퉁이 기둥 4개만 초라하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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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우스 신전은 더 심하다. 아예 기둥조차 찾을 수 없고 여기저기 돌무더기만 보인다. 신전 지붕을 떠받치던 거인족 티탄의 아틀라스 모양으로 만든 길이 7.6m 기둥도 바닥에 뒹굴고 있다. 제우스 신전은 원래 길이 113.2m, 너비 56m이며 약 4만2000명을 수용할 정도로 신전의 계곡에서 규모가 가장 컸다. 아틀라스를 기둥으로 만든 발상이 뛰어나다. 티탄 편에서 제우스를 상대로 싸운 아틀라스는 티탄이 패한 뒤 세상의 서쪽 끝에서 천구를 떠받드는 형벌을 받았다. 이런 신화를 제우스 신전에 실물로 구현한 그리스인의 상상력이 놀랍다. 맞은편 건물은 기원전 510년에 세운 헤라클레스 신전. 우람한 근육질 같은 기둥이 당당하게 서서 지금도 힘과 용기의 신화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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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레스 신전을 지나면 신전 계곡에서 제일 유명한 콩코르디아를 만난다. 가까이 갈수록 감탄이 쏟아진다. 기원전 430년쯤 세워진 신전이 원형을 거의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어서다. 유네스코 로고가 신전인데 바로 콩코르디아의 정면 모습을 담았다. 보물과 봉헌물, 기록물을 보관하던 장소다. 신전 앞은 유명한 사진촬영 구역이다. 밀랍으로 붙인 날개를 달고 한없이 날아오르다 추락한 이카로스가 땅에 옆으로 처박혀 있다. 이고라이가 만든 거대한 청동조각상은 콩코르디아 신전과 묘하게 어울리며 신화를 살아 꿈틀대도록 만드는 마법을 부린다. 어른 세 명이 두 팔을 벌려야 겨우 안을 수 있는 수백년 수령 올리브 나무들을 구경하며 계곡 끝까지 걸으면 가장 높은 언덕 위에 우아하게 선 헤라 신전을 만난다. 신전의 계곡은 워낙 넓고 걷는 방법밖에 없어서 모두 둘러보려면 왕복 3~4시간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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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연이 빚은 걸작 스칼라 데이 투르키
신들의 세상을 뒤로하고 아그리젠토 여행의 하이라이트 스칼라 데이 투르키로 향한다. ‘튀르키예인의 계단’이란 뜻이다. 과거 사라센과 튀르키예 해적들이 절벽 아래 배를 숨긴 뒤 계단처럼 생긴 절벽을 타고 올라 마을을 자주 습격했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아그리젠토에서 차로 20분 거리여서 묶어 여행하기 좋다. 휴대전화 신호가 약해 자꾸만 엉뚱한 곳을 알려주는 구글맵을 여러 차례 수정하며 헤매다 어렵게 튀르키예인의 계단을 설명하는 작은 안내판을 찾아냈다. 나무 난간 너머로 아름다운 석회암 절벽이 살짝 보이자 심장이 방망이질을 시작한다. 그런데 아뿔싸. 절벽 아래로 내려가는 출입구 문이 잠겼다. 어쩌지. 그냥 갈까. 고민 끝에 발길을 돌리려는데 현지 경찰이 다가온다. 겨울에는 위험해 출입구를 폐쇄한단다. 대신 접근할 수 있는 절벽 반대쪽 길을 친절하게 알려준다. 다행이다. 차를 몰아 동쪽으로 5분 정도 달리자 해변으로 내려가는 작은 길이 살짝 얼굴을 내민다. 꽤 넓은 주차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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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역시 위대한 작품은 쉽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 해변을 40분가량 걷자 그제야 튀르키예인의 계단이 코앞이다. 계단 모양으로 켜켜이 쌓인 하얀 석회암이 만들어낸 선명한 지층의 나이테라니. 이곳에 오기 전 수차례 영상을 봤지만 두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기지 않는 대자연의 걸작에 감탄만 쏟아진다. 튀르키예인의 계단 위로 오른다. 몸이 휘청거리는 엄청난 강풍을 뚫고 정상에 올라 반대쪽으로 돌아나가는 순간, 정신이 멍해진다. 장벽 같은 거대한 석회암 절벽이 해안을 따라 파노라마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당대 최고의 조각가가 하나하나 쌓아올리며 부드럽게 다듬은 듯한 지층의 구조가 너무나 신비롭다. 더 이상 갈 수 없는 절벽 끝까지 걸어 계단 하나 차지하고 앉았다. 강한 바람이 먹구름을 몰아내더니 서서히 파란 하늘이 열리며 밝은 햇살이 쏟아진다. 하얀 석회암 절벽이 더 하얗고 눈부시게 빛나니 이곳이 진정 신들의 세상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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