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과거 화폐는 프랑(franc)이었다. 프랑스는 1999년 1월 1일 유로존에 가입해 프랑과 유로를 같이 사용하다가 2002년 1월 1일부터는 유로만 사용하고 있다. 유로는 전 세계 금융 시장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주식 시장이나 채권 시장에서는 미국 달러 대신 유로화를 쓰겠다는 사람들도 많이 늘었다. 이렇게 막강한 힘을 가진 유로는 동전과 지폐로 이루어져 있다. 동전은 1, 2, 5, 10, 50센트, 1, 2유로가 있고, 지폐는 5, 10, 20, 50, 100, 200, 500유로가 있다. 동전 뒷면에는 유럽 지도가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유로존 가입국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반면에 동전 앞면은 가입국이 독자적으로 디자인할 수 있고, 그 디자인을 15년마다 교체할 수 있다.
올해 3월 프랑스 조폐국은 10, 20, 50센트(불어로는 상팀이라고 함)의 앞면 디자인을 교체했다. 각각 시몬 베유, 조세핀 베이커, 마리 퀴리의 얼굴을 새겨 넣었다. 이 세 명은 모두 프랑스에 이바지한 여성들인데, 프랑스 조폐국은 “씨 뿌리는 사람들이라고 불리는 이 세 명의 위인은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상징”이라고 그 선정 기준을 밝혔다.
50센트 동전에 들어가는 마리 퀴리는 노벨상을 받은 첫 번째 여성이자 노벨상을 두 번 수상한 유일한 여성으로, 최초의 방사성 원소인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하는 업적을 남겼다. 20센트 동전에 새겨지는 사람은 ‘검은 비너스’로 불렸던 조세핀 베이커이다. 유명 가수였던 그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악보에 기밀 정보를 숨겨 프랑스 관리들에게 넘겨주는 등 프랑스 측 첩보원으로 활동했다. 이후에는 인종 차별에 맞서는 인권 활동가로 활약했다. 10센트 동전에 담긴 시몬 베유는 프랑스 여성 인권의 상징으로 꼽힌다. 1974년 보건 장관 시절, “어떤 여성도 낙태를 가볍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며 낙태 합법화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이 법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베유 법’이라고 불리고 있다. 이들은 모두 프랑스의 역대 위인들이 묻혀있는 파리 판테온 신전에 잠들어있다.
프랑스에 이바지한 사람들을 새 동전에 새기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 ‘당연’으로 인해 우리가 놓칠 수 있는 게 있다. 그것은 이들의 얼굴에 다문화사회라는 얼굴이 겹쳐 있다는 것이다. 마리 퀴리는 폴란드에서 태어나 살다가 23세에 프랑스로 온 이민자이다. 조세핀 베이커는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스페인 아버지와 흑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1925년 19살에 프랑스로 온 흑인 이민자이다. 시몬 베유는 프랑스 니스에서 유대계 건축가의 딸로 태어나 여권 신장에 앞장섰으며 프랑스 여권의 상징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세 명의 얼굴에는 여성, 이민자, 흑인과 같이, 다문화 교육이나 상호문화교육에서 많이 다루는 대상의 얼굴이 겹친다. 프랑스 조폐국은 2024년 여성의 날에 맞추어 ‘여성’을 강조했으나 암묵적으로는 ‘다문화사회’를 강조하고 싶어 했을 수도 있다. 한국 조폐국은 언제쯤 새로 발행할 동전에 여성, 이민자, 흑인의 얼굴을 새길 수 있을까.
장한업 이화여대 다문화연구소장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