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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한·일 관계는 냉랭했다. 갓 취임한 전두환 대통령이 일본에 100억달러 제공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한국이 공산세력으로부터 일본을 방어하는 방파제 역할을 하니 경제 발전 자금을 지원하라는 논리이지만 일본은 강하게 반발했다. 당시 외무부(현 외교부) 차관보이던 공로명(92) 전 외무장관이 경제기획원 과장 등으로 구성된 대표단을 이끌고 일본에 갔다. 그런데 협상 도중 일본어 통역을 맡은 외무부 과장이 기획원 과장의 설명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실수를 연발했다. 보다 못한 공 전 장관이 직접 통역을 맡아서 그럭저럭 회의를 끝냈다. 그 뒤 1983년 일본은 한국에 경협 자금 40억달러를 지원하기로 결정한다. 공 전 장관의 투철한 사명감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소련과 외교관계가 없던 1990년 2월 공 전 장관은 영사처장이란 독특한 직함을 달고 모스크바에 부임했다. 노태우 대통령이 한·소 수교 성사를 신신당부하자 공 전 장관은 “출정(出征)하는 각오로 임하겠다”고 다짐했다. 그해 9월 양국이 수교에 합의하며 공 전 장관은 초대 주소 한국대사로 임명됐다. 낯설고 추운 모스크바에서 영사처 직원들을 다독여가며 소련과의 협상에 매진했던 공 전 장관의 리더십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1994년 12월 김영삼 대통령은 그를 외무장관에 발탁했다. 1958년 외무부에 들어간 지 36년 만에 이룬 값진 성취였다. 장관으로 재임한 기간은 약 2년으로 그리 길지 않으나 존재감만은 뚜렷하다. 까마득한 후배인 이용준 세종연구소 이사장은 2021년 출간된 책 ‘공로명과 나’에 기고한 글에서 자신이 외교부에 38년간 몸담으며 장관 21명을 모신 사실을 소개한 뒤 “공 장관에 필적할 만한 장관은 보지 못했다”고 단언했다.

그제 외교부 산하 국립외교원에 ‘공로명 세미나실’이 문을 열었다. 역대 외교장관 중 첫 사례라고 한다. 공 전 장관은 1992∼1993년 국립외교원의 전신인 외교안보연구원 원장을 지낸 인연이 있다. 국립외교원은 우리 외교·안보 전략을 연구하는 역할과 함께 외교관 후보자들을 교육하는 임무도 맡고 있다. 공로명 세미나실 개관을 계기로 후배 외교관들이 공 전 장관의 애국심과 협상력을 본받아 국제무대에서 우리 국익을 극대화하길 바란다.


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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