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푸티차.
봄이나 가을에 눈이 녹거나 비가 내리면 땅이 진흙탕으로 변해 질퍽질퍽해지는 때를 가리키는 러시아 말이다. 이 시기는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전차, 장갑차 등 궤도장비가 신속히 기동하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1월이나 12월 초가 진흙탕 때문에 우크라이나군에 가장 위험한 시기가 된다고 전했다.

이 때가 지나면 엄동설한이다. 포탄 장전부터 격발까지 기본적인 임무를 수행하기도 벅찬 추위가 찾아온다. 그 때문인지 우크라이나군과 러시아군은 지난해 겨울 내내 전선이 교착된 가운데 소모전을 이어갔다.
지난 6월 초 서방으로부터 지원받은 중전차를 투입해 대반격 작전에 나선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앞으로 한 달여가 지나고 나면 내년 봄 이후 땅이 다시 마를 때까지 진격이 어려운 악조건에 놓이게 된다는 얘기다.
미국 시사주간 뉴스위크에 따르면 우크라이나군 정보당국의 수장인 키릴로 부다노프는 최근 인터뷰에서 “추위, 비, 진흙탕 속에서는 전투가 더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전투는 계속될 것이다. 즐거운 일도 아니지만 큰 문제도 아니다”라고 덧붙였지만, 한시 빨리 영토를 수복해 유리한 조건에서 휴전 내지 평화 협상을 하고자 하는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달가울 리가 없는 계절적 환경이다.

◆남부 공략에 집중하는 우크라
우크라이나군은 현재 자포리자 남부 지역 공략에 집중하고 있다. 미국 CNN방송에 따르면 지금껏 지원받은 서방 장비들은 멜리토폴과 벨리카 노보실카 양쪽으로 향하는 두 축에 집중 배치돼 있다. 우크라이나군의 궁극적 목표는 흑해 해안까지 진격해 크름반도와 러시아 본토 간 보급로를 차단하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측은 최근까지 참호, 대전차 장애물, 지뢰 등으로 구축된 러시아의 3중 방어선을 뚫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8월 말 자포리자주 요충지 로보티네를 탈환한 데 이어 9월 초 러시아의 1차 방어선을 돌파했다고 주장했지만, 아직은 남부 작은 마을 몇 곳을 탈환하는 데 그쳐 진전이 더디다고 CNN은 평가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M1A1 에이브럼스 전차가 지난 25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에 도착해 주목된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텔레그램을 통해 “에이브럼스가 이미 우크라이나에 도착해 우리 여단을 강화할 준비를 하고 있다”며 “약속을 지킨 동맹에 감사드린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에이브럼스 전차가 전황에 미칠 영향은 기상 조건에 달렸다고 평가했다. 국방 전문가인 마이클 펙은 뉴스위크에 “에이브럼스 전차는 상대적으로 건조한 환경에서 전투를 수행해왔다”며 “진흙탕과 눈 속에서 집중적인 기계화 전투가 펼쳐지는 동안 이 전차가 어떤 역량을 선보일지 흥미롭다”고 말한 바 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레믈궁 대변인은 26일 이와 관련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다른 외국산 탱크에 대해 쉽게 불타 버린다고 말한 것을 기억하라. 이들 역시 불탈 것”이라며 에이브럼스 전차가 우크라이나에 인도됐다고 해서 전황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크름반도 직접 타격도
우크라이나는 최근 드론과 미사일을 이용해 크름반도에 대한 공세 수위도 끌어올리고 있다. 지난 20일 세바스토폴 인근 흑해함대 사령부 타격을 시작으로 23일까지 나흘 연속 우크라이나군 미사일이 크름반도에 떨어졌다.
푸틴 대통령의 ‘자존심’으로 불리는 케르치해협대교(크름대교)에 제한적인 공격만 가하던 우크라이나 측에서는 눈에 띄는 변화다.
크름반도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뒷받침하는 핵심 보급창이자 해군력을 지탱하던 기지여서 우크라이나군의 위협 강도에 따라 전체 전황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러시아 측은 우크라이나의 흑해함대 공격이 가능했던 것은 미국과 영국의 조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AFP통신에 따르면 마리야 자하로바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은 27일 “그 공격은 서방의 정보 자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위성 장비와 정찰기를 이용해 사전에 계획됐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며 “미사일 공격은 미국, 영국 정보당국의 긴밀한 협조로 수행됐다”고 말했다.
◆동부 격전은 다시 바흐무트 중심으로
동부 지역 전황은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그루브(Groove)라는 호출부호(Call Sign)를 사용하는 우크라이나 드론 조종사는 “우리는 여기서 적의 방어선을 잘 돌파하고 있다”며 “러시아 용병기업 바그너그룹도 이 지역으로 돌아왔다”고 말했다고 CNN이 바흐무트 인근 전선 현장 취재를 통해 보도했다.
바그너그룹이 전선에 복귀했다는 것은 우크라이나 동부 전선의 러시아군이 병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는 증거라고 그루브는 추정했다.

CNN은 이곳의 우크라이나군이 열화상 카메라가 장착된 드론을 이용해 야간 시간대에 러시아군 장갑차와 전차뿐 아니라 요새, 탄약고 등을 타격하고 있다고 전했다. 드론 공격이 속도를 내면 포병 화력 지원이 뒤따라 미국이 지원한 집속탄이 러시아군 진지에 쏟아진다는 설명이다.
다만 우크라이나 동부군은 남부군보다 서방 첨단 장비 지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힘보다는 전술적 변화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방송은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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