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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의 일상 속 문화사] 여왕의 마지막 길, 촌로의 죽음처럼 ‘관’을 보여 배웅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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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09-27 06:00:00 수정 : 2022-09-26 19:4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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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여왕 운구차 왜 창문이 있었을까?

엘리자베스 장례식 ‘런던 브리지 작전’
英 브랜드 재규어 개조한 운구차 사용
여왕이 생전에 직접 디자인까지 골라

유럽선 예전 ‘허스’라는 운구장치 이용
관을 보이게 하도록 얹는 구조로 제작
말이나 사람이 끌다 자동차로 바뀌어

과거 마을 장례식에는 관 숨기지 않아
모두가 세상 떠난 사람을 알기에 애도
그 이유로 여왕과 필부의 예식 같아져

지난 8일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가 머무르고 있던 곳은 스코틀랜드의 밸모럴성이었다. 생전에 남편 필립 공과 여름마다 찾아가서 시간을 보낸 애착 어린 장소였다고 하고, 아마도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알고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낼 장소로 선택한 것 같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코틀랜드가 여왕이 묻히게 될 장소는 아니었다. 묘지로 정해진 곳은 런던에서 멀지 않은 윈저성이었다. 그 성 안에 있는 세인트조지 예배당은 각종 왕실 행사가 행해지는 장소인 동시에 조지 3세 이후 많은 왕족이 안장된 곳으로, 엘리자베스 2세도 먼저 세상을 떠난 필립 공과 함께 그곳에 묻혔다.

英 여왕 운구차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운구차는 영국의 재규어를 개조해서 만들었다.

하지만 눈을 감은 장소와 장지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여왕의 관을 운반해야 하는 엄청난 작업이 필요했다. 아무리 입헌군주제라 해도 왕은 국가의 상징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국가 그 자체를 의미하기 때문에 (영국에서 국가를 부를 때 왕은 따라 부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영국 국가는 왕에게 부르는 노래이기 때문이다)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다행인 건 여왕이 워낙 장수했기 때문에 왕실은 여왕의 서거에 대비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고, ‘런던 브리지 작전’이라는 코드명까지 붙여가며 오래전부터 대비해왔다.

그런데 여왕의 시신이 밸모럴성을 나서는 모습을 본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관을 싣고 성을 나서 에든버러를 지나 공항에서 대기 중인 공군 수송기까지 가는 차량이 독일 메르세데스 벤츠 E클래스를 개조한 운구차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비록 소유권은 외국으로 넘어갔지만 엄연히 영국을 대표하는 자동차 브랜드들이 살아 있는데 외국 차량을, 그것도 독일의 차량을 사용하는 것을 두고 적절한 선택이 아니라는 말이 나왔다. 엘리자베스 2세는 2차 세계대전 중에 군에서 운전병, 자동차 수리병으로 복무한 전력이 있었고 자동차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독일 차량이 선택되었다는 사실이 아쉬웠던 사람들에게는 다행하게도 잉글랜드에 도착한 후 장지까지 가는 마지막 길에는 영국의 고급 자동차 브랜드인 재규어를 개조한 운구차가 사용되었다. 후문에 따르면 왕실은 이 운구차의 디자인을 두고 여왕에게 직접 상의했고, 여왕이 여러 후보 차량 중에서 직접 고르고 디자인을 선택했다고 한다. 자신의 운구차 디자인을 정한다는 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많은 노인들이 영정 사진과 수의를 미리 마련해두는 것을 생각하면 특별히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런데 여왕의 운구차를 보면 범상치 않다. 요즘은 한국에서도 검은색의 고급 대형 차량을 운구차로 사용하는 일이 흔하지만 이런 경우 거의 예외 없이 관이 들어가는 부분은 검은색으로 가려져 외부에서 관을 볼 수 없게 해두었다. 과거에는 조문객을 태운 버스 뒤쪽 아래에 화물칸처럼 생긴 곳에 관을 넣어 운반했지만, 두 경우 모두 관은 드러나지 않게 꼭꼭 숨겼다. 장례와 무관한 사람들이 길에서 운전하다가 느닷없이 관을 보게 되는 건 유쾌한 경험이 아닐 수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배려일 것이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때로는 전 세계에 중계되는 왕이나 전직 대통령의 장례는 다르다.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에 굳이 시신을 넣은 관을 숨길 필요가 없고, 그를 따르고 지지하던 사람들은 그의 마지막 길을 멀리서나마 보고 싶어 하기 때문에 오히려 운구차에 커다란 창문을 만들어 볼 수 있게 하는 건 조문하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다.

말이 끌던 운구장치 ‘허스’ 프랑스 지역에서 사용되던 전통적인 허스(hearse). 옆에 붙은 손잡이에서 알 수 있듯 원래는 말이 끌지 않고 사람들이 직접 미는 방식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관을 드러내는 것은 사실 과거의 전통적인 장례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의 전통 장례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문화에서 관을 숨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통적인 장례는 현대 도시처럼 익명의 공간이 아니라 대부분 마을과 같은 작은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 누구나 세상을 떠난 사람을 알고 있고, 그의 죽음을 애도했기 때문이다. 여왕의 죽음을 전 세계 사람들이 아는 것처럼 이름 없는 촌로의 죽음이라도 그가 평생 살았던 마을의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는 셈이다.

한국어로 운구차는 말 그대로 ‘관을 운반하는 차량’이라는 뜻이지만 영어에서는 자동차라는 표현 대신 허스(hearse)라는 별도의 명칭을 사용하는 일이 흔하다. 이 단어는 라틴어 헤르펙스(herpex)에서 왔는데, 이는 원래 논바닥 흙을 부수는 써레(harrow)를 의미했다. 이 이름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건 농경사회의 장례 행렬에서 관을 마차에 실었다기보다는 말이 끌고 가는 써레를 닮은 별도의 장치를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프랑스 지역에 남아 있는 오래된 허스의 경우 마차처럼 바퀴가 달려 있지만 사람이 끌게 되어 있고, 관은 그 위에 얹게 된 구조다.

많은 전통 문화에서 관을 사람들이 직접 메고 옮겼던 것처럼 서양에서도 (바퀴를 달기는 했어도) 사람들이 직접 끄는 전통이 있다. 이번 엘리자베스 2세의 운구 때도 일부 구간에서는 관을 대포 운반용 마차에 싣고 왕실 기마포병대가 직접 끄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관과 허스에 장식이 많아지고 무거워지면서 말이 끄는 방식으로 바뀌었다가 나중에는 자동차에 싣는 방식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하지만 동력은 바뀌었어도 이름은 남아서 장례 차량은 아직도 허스라고 불린다.

S자 랜도바 달린 마차 랜도 마차의 모습. 지붕을 지탱하는 S자 모양의 구조물을 볼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말이 끌던 허스가 자동차로 넘어올 때 사용된 첫 모델은 엔진 차량이 아니라 전기차였다. 1900년대 초에 전기로 가는 운구차가 있었다면 거짓말처럼 들리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만 해도 마차를 대체할 자동차의 동력원이 아직 결정되지 않았고, 지금과 같은 내연기관, 배터리를 사용한 전기차, 그리고 증기기관과 같은 외연기관, 이렇게 세 가지의 서로 다른 동력 방식이 경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02년에 미국 역사상 최초로 ‘대통령 카 퍼레이드’를 한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탔던 차량도 전기차였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내연기관은 다른 동력 방식을 누르고 자동차업계의 대세가 되었고, 1907년에는 처음으로 내연기관이 적용된 허스, 즉 운구용 자동차가 등장했다. 이런 역사를 가지고 발전해서 지금에 이른 운구차는 마차 시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자세히 보면 디자인적인 유산도 가지고 있다. 요즘 길거리에서 볼 수 있는 서양식 운구차(캐딜락이 많이 사용된다. 고급차의 대명사이던 시절에 생겨난 전통이라는 설이 있다)의 옆을 보면 S자를 길게 늘인 장식이 붙어 있는 경우가 많다. 지금은 특별한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 장식이지만 과거 마차 시절에는 중요했던 요소다. 마차의 종류 중에 랜도(Landau)라는 게 있는데, 이 마차는 지붕을 폈다 접었다 할 수 있었다. 그 지붕을 펼 경우 지탱해주는 구조물이 바로 S자 모양의 랜도바(Laudau bar)였다. 예전에는 권위적인 느낌을 주는 고급 차량에 장식으로 붙어 있었지만 대부분 사라졌다.

하지만 운구차량(허스)에만은 여전히 부착된다. 문화에서 가장 느리게 변하는 것이 장례와 관련된 예식, 절차이기 때문이다. 이는 필부의 장례식이나 여왕의 장례식이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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