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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리 빈곤, 개인 문제 아냐”… 보편복지 대응 목소리 고조 [세계는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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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09-24 20:00:00 수정 : 2022-09-24 17:4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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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경권 보장’ 글로벌 화두 부상

英 스코틀랜드, 세계 첫 생리대 무상공급
美 12개州선 무료 생리용품 비치 의무화

팬데믹·불평등 심화로 여성 건강권 위협
국제기구 ‘존엄한 월경’ 등 공론화 캠페인

韓 ‘깔창 생리대’ 이후 취약층 지원 확대
학교 밖 청소년 등 여전히 사각지대 남아
영국 스코틀랜드가 최근 세계 최초로 모든 여성에게 생리대 무상공급을 시작한 것을 계기로 각국에서 월경권(月經權) 보장 문제가 화두로 부상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과 경제·사회적 불평등 심화로 취약계층 여성의 월경 건강 문제가 점점 더 위협받고 있기 때문이다. 생리 빈곤(Period Poverty)을 개인 문제로 축소해서는 안 되고, 건강권·인권 담론의 하나로 공론화해 보편복지 차원에서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생리빈곤’ 공론화 필요성 대두

스코틀랜드에서는 지난달 15일(현지시간) 지방자치단체와 학교 등 공공기관이 생리대·탐폰 등을 비치해 놓고 필요한 모든 여성에게 무상 제공하도록 의무화한 생리용품법 시행에 들어갔다. 연간 예상 소요금액은 870만파운드(약 137억원)인데 스코틀랜드의 가임기 여성은 120만명 정도다. 영국 시민단체들은 중앙 정부에 스코틀랜드와 같은 무상 생리대 정책의 전면적 시행을 요구하고 나섰다.

영국 스코틀랜드의 무상생리대법 입법을 주도한 노동당 모니카 레논 의원이 2020년 지지자들과 월경권 관련 캠페인을 하는 모습. 스코틀랜드에서는 지난달 15일 세계에서 처음으로 각 지방자치단체와 학교 등 공공기관이 모든 여성에게 생리대·탐폰 등을 무상 제공하도록 의무화한 법이 시행에 들어갔다. 레논 의원 트위터 캡처

세계은행은 전 세계적으로 최소 5억명의 여성과 소녀가 생리용품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월경권 보장 운동을 하는 국제기구 존엄한 월경(Dignity Period) 측은 “월경을 언급하는 것은 여전히 여러 나라에서 금기시되고 있다. 생리용품에 접근하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문제도 은폐되고 있다”고 했다.

존엄한 월경은 현재 아프리카 에티오피아를 중심으로 월경권 관련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단체에 따르면 에티오피아 시골의 소녀 대부분이 충분한 생리용품을 사지 못해 고통받고 있다. 매달 평균 5일가량 사용해야 하는 생리용품 가격이 너무 큰 부담이다. 생리대 구입에 필요한 평균 비용은 1인당 국내총생산(GDP: 2020년 기준 936달러)의 17%에 달하는 연 159달러(생리컵 업체 인티미나 조사)에 달한다.

이번 여름 전례 없는 대홍수로 막대한 피해를 본 파키스탄에서도 800만명 넘는 가임기 여성이 생리 관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미국 주간 타임(TIME)에 따르면 생리용품 없이 방치된 이들은 나뭇잎을 생리대로 사용하며 월경이 끝날 때까지 방에 갇혀 있거나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있다. 국토 3분의 1이 침수되고 66만명 이상이 구호 캠프와 임시 가옥에 거주하는 상황 속 생리용품 확보는 불가능한 미션에 가깝다.

월경에 대한 언급을 꺼리는 파키스탄 문화는 생리용품 공급 문제를 간과하게 한다. 피해 지역에 대한 긴급 구호가 진행되는 상황에서도 생리용품과 관련해서는 제대로 대응이 안 되는 이유다.

파키스탄 여성을 돕기 위해 지난 7월 풀뿌리단체 생리정의(Mahwari Justice)를 설립한 대학생 부쉬라 마노르는 “사람들이 월경과 수치심을 연관시키기 때문에 도움 요청을 하지 않고 쉬쉬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파키스탄 아가칸 대학병원 산부인과연구위원회 부위원장인 시드라 너쉰 박사도 “월경 위생 문제는 파키스탄에서 아무도 얘기하지 않는 주제이며, 많은 여성은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른다”고 했다.

선진국 영국의 상황도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영국 시장조사 기업 유고브(YouGov)는 생활비 압박이 50년 만에 가장 클 것으로 전망되는 내년엔 영국 가임기 여성 8명 중 1명(13%)은 생리용품을 살 여유가 없을 것으로 전망했다. 월경권에 대한 일반 시민의 인식도 낮다. 14일 유고브가 발표한 월경 인식조사에 따르면 영국인 3명 중 1명(29%)은 생리 빈곤이라는 용어를 들어본 적 없다고 답했다. 용어 의미에 대해서도 대부분 ‘생리용품을 구입할 수 없는 상태’(78%)로만 협소하게 이해했는데, ‘생리용품 접근권 없음’(43%), ‘월경 건강 관리에 대한 무지’(28%), ‘월경 건강 교육을 받지 못함’(20%)도 모두 해당한다고 유고브는 설명했다.

브라질은 지난해 9월 어려운 환경의 여성에게 위생용품을 무료로 제공하는 법을 의회가 통과했으나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발효가 무산됐다.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특정 집단에만 이익을 줄 수 있다”, “여성 스스로 무료로 나눠주는 생리대를 확보하라”고 주장해 세계적으로 논의가 확산하고 있는 월경권 보장 노력에 역행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세계 곳곳서 월경권 보장 움직임

월경권 보장을 위해서는 생리용품 의무 비치부터 생리대 세금 폐지, 생리 문제를 자유롭게 말하는 문화의 정착까지 폭넓은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 가장 먼저 무상 생리대를 실현한 스코틀랜드의 법은 ‘생리용품을 받는 것이 복잡하거나 너무 관료적이지 않아야 한다’고 명시했다. 생리용품이 필요한 이유와 필요한 양을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규정도 있다. 월경권을 보장하려면 선별 지급이 아닌 보편 지급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이 법의 취지다.

발의자인 노동당 모니카 레논 의원은 “(스코틀랜드가) 생리용품 무상 제공을 법제화한 첫 사례이지만 마지막은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를 인지한 여러 나라에서 개선을 위한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현재 영국 북아일랜드가 비슷한 조치를 검토 중이다. 미국의 캘리포니아, 델라웨어, 일리노이 등 12개 주에선 모든 여성 화장실에 무료 생리용품을 비치하도록 의무화하는 법을 제정했다. 영국은 2020년부터 모든 초·중학교에 생리용품을 비치했고, 지난해 1월 생리용품 부가가치세(5%)를 폐지했다. 독일도 지난해 생리용품을 사치품이 아닌 생활필수품으로 분류해 세율을 19%에서 7%로 대폭 낮췄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생리대 가격이 가장 비싼 한국은 2016년 깔창생리대 사건 이후 취약계층 청소년의 건강권 보장 차원에서 지원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아직은 선별 지급이라 지원받는 학생에 대한 낙인효과, 학교 밖 청소년은 지원의 사각(死角)지대에 있다는 점이 한계다. 한국은 생리대를 생활필수품으로 규정해 2004년부터 부가가치세(10%)를 면제하고 있어도 생리대 가격 자체가 높아 큰 의미가 없다. 여성가족부가 물가 상승률을 반영해 해마다 3∼4%의 지원금을 올리고 있지만 생리대 가격 인상 폭이 훨씬 크다는 지적이다.

◆월경정책 책임자 남성 뽑았다가 역풍

월경권 확대 과정에서 잡음도 있다. 스코틀랜드 테이사이드에서 첫 번째 생리존엄담당관(Period Dignity Officer)으로 남성을 임명해 여성의 거센 반발을 불렀다. 여성 지원자들을 놔두고 생리를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남성이 생리관련 업무 총괄을 맡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비판이었다.

미국 테니스 스타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는 “여성들이 면도하는 법이나 전립선 관리하는 법 등을 남성에게 설명하려 한 적이 있었느냐”며 “(남성에게 월경정책을 맡기는 것은) 완전히 어리석은 짓”이라고 비난했다. 여성인권 활동가 수전 달게티도 “(남성이) 다른 사람 앞에서 드레스가 피투성이가 되는 공포를 경험한 적이 있는가. 생리가 시작되지 않아 터질 것 같은 불안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당국은 “성별, 나이, 배경을 불문하고 가장 적합한 사람을 뽑았으며 생리에 대한 편견을 없앨 수 있을 것”이라고 버티다가 한 달 만에 결국 무릎을 꿇었다. 담당관 임명 철회는 물론 아예 자리까지 없앴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이런 결과에 대해 남성이 월경정책을 감독하고 맨스플레이닝(Mansplaining: 남성 중심적 사고로 여성을 가르치려고 하는 행태)하는 것에 대한 여성의 분노가 치솟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지난 4년간 스코틀랜드에서 월경권 관련 캠페인을 주도한 레논 의원은 “월경 관련 논쟁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밀려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이 일로 어렵게 성사된 스코틀랜드의 선구적인 정책이 퇴색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지혜 기자 wisdo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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