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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한 위대한 미국인(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 선언에 서명했습니다. … 그러나 100년이 지난 지금도 흑인들은 여전히 자유롭지 않습니다.” 미국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가 1963년 연설에서 한 말이다. 한 세대가 지난 뒤인 1992년 정치학자 앤드루 해커는 저서 ‘두 나라’에서 “거대한 인종 간극이 남아 있고, 다가오는 세기에 그것이 봉합될 징조는 거의 없다”고 했다. 1991년 미국 최초의 흑인 합참의장으로 걸프전을 승리로 이끈 콜린 파월이 ‘존경하는 미국인’ 여론조사에서 오프라 윈프리 등과 함께 빈번히 거명되던 때다. 미국의 인종차별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 알 수 있다.

뉴욕 할렘 빈민가의 자메이카 출신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파월은 온갖 역경을 이겨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흑인 최초의 국무장관까지 지냈다. 딕 체니 부통령 등 강경파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이 득세하던 시절에 온건 외교를 지향하면서 원칙과 소신을 지켰다. 쿠바 관타나모 미군기지에 수용된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전사들에 대해 부시 대통령이 “전쟁포로가 아니다”라고 선언하자 파월은 “그들을 전쟁포로로 대우하지 않는다면 미국이 제네바 국제협약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제동을 걸어 입장을 바꾸도록 했다.

그는 2003년 유엔 안보리에서 위성사진·감청자료를 제시하며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WMD)를 개발하고 있다고 주장해 이라크전쟁의 길을 열었다. 당시 조지 테닛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제공한 정보에 의문이 제기되자 파월은 유엔에 가길 꺼렸지만 백악관이 강력히 요구해 테닛의 배석을 조건으로 수용했다. 결국 전쟁 후 WMD 개발 증거를 찾지 못했고 훗날 “평생 씻을 수 없는 오점”이라고 실토했다. 한 번의 실수가 족쇄가 된 것이다. 국무장관 퇴임 후에는 정치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파월이 18일 코로나19 감염 합병증으로 별세했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그는 인종의 장벽을 부수고 연방정부에서 새로운 길을 개척하며 차세대를 위해 자신의 생을 바쳤다”며 “위대한 미국인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했다. 최초의 흑인 국방장관인 로이드 오스틴은 “오랫동안 나의 멘토였다”고 애도했다.


박완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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