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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란 20년-한국 경제 현주소] “30년간 정치가 파괴한 경제생태계… 복원 위한 개혁 시급”

입력 : 2017-11-23 19:22:26 수정 : 2017-11-23 22: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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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끝 IMF 협상 수석대표 지낸 정덕구 니어재단 이사장 / 외환위기 겪은 국민 ‘생계형 인간’ 전락 / 누구도 다음 세대 걱정하는 사람 없어 / 양극화 고착… 젊은이들도 모험 안해 / 5년 단임 정부, 큰 그림 없이 단기 처방 / 기업은 매 정권 몸사리느라 투자 꺼려 / 노동·자본 한 배 타야 경제생태계 복원
“다음 위기는 경제생태계의 반란에서 올 것이다.” 정덕구 니어재단 이사장은 “1987년 이후 30년 동안 정치가 경제를 크게 압도하고 5년 단임 대통령제의 병폐가 깊어지면서 한국 경제의 생태계가 파괴됐다”면서 “경제생태계의 건강성을 회복하지 못하면 한국 사회의 병리 현상이 깊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정 이사장은 20년 전 국제통화기금(IMF) 협상 수석대표를 맡아 한국을 국가부도 위기에서 구해냈다. 그는 IMF 외환위기 10년을 맞은 시점에 자신의 경험을 담은 ‘외환위기 징비록(懲毖錄)’을 출간해 IMF 위기의 부정적 유산(역동성 약화, 양극화 심화, 국가·사회의 문제 해결 능력 약화, 공동체주의 약화)으로 사회 전반의 생산성과 효율성이 크게 떨어지고 있다는 경고음을 울렸다. 환란 이후 출범한 진보정부(김대중, 노무현) 10년을 지켜본 뒤였다.

곧이어 보수정부(이명박, 박근혜) 10년이 이어졌지만 한국 경제의 병통은 더 심해졌다는 것이 정 이사장의 진단이다. 세계일보는 환란 20년 시리즈를 마감하면서 외환위기 수습 과정에서 ‘우리 경제의 배를 가르고 그 내부를 들여다보는 특별한 경험을 했던’ 정 이사장을 만나 한국 경제가 처해 있는 현실과 나아가야 할 방향을 물었다. 인터뷰는 지난 20일 서울 여의도 니어재단 사무실에서 이뤄졌다.

정덕구 니어재단 이사장이 지난 20일 서울 여의도 니어재단 사무실에서 세계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외환위기 20년을 맞은 한국 경제의 생태계 복원이 시급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하상윤 기자

-외환위기 20년을 맞는 소회가 남다를 것 같다.

“외환위기 20년이라고 하지만 지금 국민들의 마음에 ‘잘해봐야지’ 하는 생각은 없다. 대한민국 국민은 생계형 인간이 됐다. 국가공동체를 걱정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나라경제도 추격을 할 때가 있다. 그때는 국민들이 총력을 다해 달린다. 우리 경제는 박정희정부 때가 추격의 시기였다. 대통령 혼자 한 게 아니라 모든 국민이 같이 뛰었다. 그 시대에는 국가리더십이 강했다. 장발하면 깎이고 시위하면 감옥 가는 일도 있었지만 다음 세대에 영광된 조국을 물려주기 위해 현 세대가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지금은 대통령이나 국민이나 그런 생각을 안 한다. 10년, 20년 내다보면서 다음 세대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나라가 정체기에 들어섰다는 얘기다.”

-어쩌다 정체에 빠진 나라가 됐나.

“1987년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되면서 정치가 경제를 과도하게 압도하게 됐다. 모든 문제를 경제논리 대신 정치논리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사회 전 분야에 만연하게 됐다. 외환위기도 어느 면에서 보면 국가지배구조, 거버넌스의 문제였다. 외환위기가 터졌는데 1997년 봄부터 가을까지 엉거주춤한 상태로 흘러갔다. 마치 전쟁이 터졌는데 지휘관이 어쩔 줄 모르는 상황과 흡사했다. 기아자동차가 부도났을 때 기업의 은행 채무에 대해, 특히 외국 은행이 국내 은행에 빌려준 돈에 대해 정부가 지급보증을 해준다는 말 한마디만 해줬으면 외환이 나가지 않았을 것이고 외환위기는 없었을 것이라고 후회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거버넌스가 없었다. 외환위기를 전후로 이런 느슨한 국가지배구조가 6번째 지속되고 있다. 5년 단임 대통령들은 위기에 대한 근본 처방을 내리기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강화하는 쪽에만 관심을 쏟는다. 불안하니까 자기 지역, 자기 파벌 중심으로 대통령을 민다. 그렇게 당선된 대통령은 자기 쪽 사람만 챙긴다. 그러다 보니 과잉 정치화, 과잉 이념화로 치닫는다. 이게 우리 경제를 망쳐왔다. 5년마다 새 정부가 들어와서 파괴를 일삼는다. 아날로그가 디지털로 대체되듯 새것이 옛것을 밀어내는 슘페터식 ‘창조적 파괴’가 아니다. 새것은 만들어내지도 못하면서 기존 것을 없애는 소멸적 파괴다. 숲의 생태계를 복원하려면 새 나무를 심고 다 크면 잘라야 하는데 5년 단임 정부는 이미 심어진 나무부터 자른다. 이런 환경에서 관료는 굴종할 뿐 추종하지 않는다. 어차피 정권은 또 바뀌니깐. 기업인은 정치인의 눈치만 보면서 위험을 회피하려 한다. 그러니 투자가 일어나지 않는다. 강성해진 시민사회는 자기 몫을 더 크게 주장하고 나선다. 이런 정부와 관료, 기업, 시민사회가 적절히 영합하면서 만들어진 느슨한 국가지배구조는 문제해결 능력이 없다. 그래서 터진 게 외환위기다.”

-그래도 역대 정부는 보수든, 진보든 나름의 성장정책을 펴지 않았나.

“5년 단임 정부는 외발자전거를 타고 5년만 가려 했다. 어떤 정부는 노동, 어떤 정부는 자본에 치중했다. 노동과 자본, 둘 중 하나에 중심을 뒀을 뿐 이 둘을 연결하려고는 안 했다. 그러다 보니 경제주체 간 연결고리가 사라졌다. 정부와 기업, 가계를 잇는 피댓줄(벨트)이 끊어졌다. 이런 상황에서는 전기를 올려도 헛바퀴가 돌게 된다. 우리나라는 제조업 구조를 오래 끌고 오면서 제조업의 생산성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 정년 연장은 노동 생산성을 떨어뜨린다. 그러면 자본의 한계효율을 높여야 하는데 기업이 신규투자를 꺼리면서 자본효율은 노동생산성보다 더 빠른 속도로 떨어졌다. 이렇게 가면 잠재성장률이 제로가 되고 그걸 메우기 위해 재정을 쏟아붓다 보면 재정파탄에 이른다. 경제생태계의 반란이다. 그때는 돈을 쏟아부어도 소용없다.”

-경제생태계를 복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한의학에서는 몸의 경혈을 따라 기가 움직인다고 한다. 그래서 머리가 아픈 환자의 손목에 침을 놓기도 한다. 순환체계를 통해 병을 고치는 것이다. 이처럼 경제생태계도 원활하게 순환해야 한다. 지금은 순환체계가 막혀 있다. 대표적으로 가계와 기업이 연결돼 있지 않다. 생태계가 자꾸만 침하하고 있다. 생태계 복원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치개혁이다. 우리 경제를 압박하고 있는 과잉 정치화, 과잉 이념화의 덫을 제거해야 한다. 기득권의 거대한 담합구조를 제거해야 한다. 이 작업은 5년 단임 대통령 혼자 할 수 없다. 수십년 동안 형성된 기득권을 혁파하려면 이를 해체하는 데도 수십년이 걸린다. 정치가 길게 봐야 한다. 5년 단임 정부는 시계(視界)가 5년밖에 안 된다. 내일을 걱정하면서도 오늘이 급한 정부다. 이것이 앞서 말한 정체기의 현상이다. 신체를 보면 간과 신장이 독소를 걸러낸다. 사회에서는 언론과 지식사회가 그 역할을 한다. 언론과 지식사회가 그걸 제대로 못하고 있다.”

IMF 협상 타결되던 날 국가부도 위기에 놓인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과 구제금융 협상을 하고 있던 1997년 12월3일 미셸 캉드쉬 IMF 총재가 싱가포르 항공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 강만수 재경원 차관(맨왼쪽)과 정덕구 재경원 제2차관보(맨오른쪽)의 마중을 받으며 입국하고 있다. 당시 정 2차관보는 IMF와의 실무협상을 주도했다. 협상은 캉드쉬 총재가 입국한 날 타결됐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어떤 정치개혁이 필요한가.

“내가 국회의원 2년만 하고 그만뒀다. 정파 이익을 위하여 이익담합 구조에 갇혀 있는 그들 앞에서 나는 항상 혼자였다. 내 외침은 크게 울렸으나 이를 귀담아듣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의원직 사퇴 직후 니어재단을 창립했다. 정당정치에 가면 국회의원은 장기판의 졸이다. 의원은 헌법기관이 아닌 추종자일 뿐이다. 계파 이익을 우선하는 칡뿌리 민주주의를 국민 주권의 풀뿌리 민주주의로 전환해야 한다. 정당의 정책 생산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 이런 정치개혁으로 체제를 잘 갖추면 4년 중임제든 의원내각제든 상관없다. 5년 단임제의 한계인 쇼터미즘(short-termism:단기적인 이익만 생각하는 주의)도 개선해야 한다.”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한국 국민의 생존 방정식도 달라졌다.

“정치도, 정부도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다고 생각한 국민은 독자생존으로 갈 수밖에 없다. 각자도생이다. 생존 터전이 척박하기 때문이다. 국가공동체에 대한 부채의식이라든지, 주인의식을 가진 사람이 거의 없다. 생존형 인간은 크게 변하는 것을 싫어한다. 힘 있는 사람은 힘 있는 사람끼리, 힘없는 사람은 힘없는 사람끼리 모여서 담합 구조를 형성한다. 자기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몸부림이다. 기득권 구조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 구조 안에 편입되면 바보도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다. 생존형 인간으로 구성된 사회는 새로운 것을 창출해내기 힘들다. 부모들의 과보호로 아이들이 나약해졌다. 내가 10년 고생해서 수백명 먹여살리는 사업가가 되겠다는 젊은이들이 없다. 부모들이 말린다. 모험심을 독려하는 사회 분위기, 가정 분위기가 사라졌다. 국민들이 물렁해졌다. 다음 세대가 우리 세대보다 못살 것이라는 일반적 견해에 동의한다. 사회생태계는 양극화, 단층화됐다. 부자끼리 모여서 같은 학교 보내고 같은 헬스클럽 다니면서 자기들끼리 소통한다.”

-문재인정부는 임기 동안 어떻게 해야 하나.

“문재인 대통령이 두발자전거를 타고 경제생태계의 숲을 쭉 돌아본 뒤 멀리 보고 페달을 밟았으면 좋겠다. 자본과 노동을 한 배에 태워야 한다. 외발자전거로는 멀리 갈 수 없다. 두발자전거를 타고 긴 호흡과 담대한 인내를 갖고 다음 정부에 무엇을 넘겨줄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잘못된 길을 너무 오래 걸어왔다. 그동안 정치가 해도 너무 했다.”

대담=조남규 경제부장
정리=이진경 기자

●정덕구 이사장은
고려대 상대를 졸업하고 미국 위스콘신대 매디슨교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제10회 행정고시로 공직에 입문, 재정경제원 대외경제국장, 기획관리실장, 제2차관보, IMF 협상 수석대표 등을 거쳐 재정경제부 차관, 산업자원부 장관을 역임했다.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중국 베이징대와 런민대 초빙교수, 17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저서로는 ‘거대 중국과의 대화’, ‘키움과 나눔을 넘어서’, ‘외환위기 징비록’, ‘한국을 보는 중국의 본심’, ‘기로에 선 북중관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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