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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철칼럼] 이유 없는 ‘망국’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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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10-12 23:22:09 수정 : 2017-10-12 23: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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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정세의 변화 못 읽고 / 대외 전략·노선 어리석으면 / 삼전도 굴욕 피할 수 없어 / 미래 보고 국가역량 키워야 영화 남한산성의 현실세계는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다. 왕과 중신들의 경우에 그렇다. 인조는 삼전도의 굴욕 이후에도 13년을 더 집권했다. 주화파 최명길은 산성을 내려간 뒤 인조의 신임으로 정승의 반열에 올랐다. 척화파 김상헌은 팔순을 넘기며 장수했고 후손 안동 김씨들은 세도정치로 권세를 누렸다. 둘 사이에 끼여 지질했던 김류 역시 인조에 의해 영의정으로 재기용됐다.

백성들도 형편이 좋아졌을까. 조선왕조실록은 전한다. “임금이 삼전도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했다. 밭 한가운데서 진퇴를 기다리던 임금이 해질 무렵 송파나루에서 배를 타고 건너는데 백관들이 앞다투어 임금의 옷을 잡아당기며 배에 올랐다. 포로로 잡힌 부녀들이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라고 울부짖었다.” 어디서나 죽어나는 것은 민초들이다. 왕과 중신은 나라를 지키는 데 실패해도 살지만 백성은 그들 때문에 죽는다.

남한산성에서 주화파와 척화파 간의 대립이 서사적이긴 하나 결코 본질은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집권세력이 두 번의 청나라 침략을 전후해 국가안보 위기에 충분히 대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청나라의 힘이 주변을 압도하고 명나라의 국운이 기울면 판세변화에 맞춰 대외전략과 노선을 수정해야 한다. 그게 진정 나라와 백성의 살길이다. 그들이 지킨 것은 자신들의 안위와 왕조, 가문의 영광이었다. 위기관리 리더십이 조금이라도 가동됐다면 북방의 기운이 불길한데도 이괄반정 이후 국경수비대 군사를 대거 근왕병으로 불러들이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누구라도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당하면 다시는 안 당하기 위해 굳은 결심을 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지배세력은 당연히 국가혁신에 나서고 국력을 키우는 데 몰두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달라지지 않았다. “병자호란 이후 사대부 계층은 책임회피 차원에서 더욱 명분과 의리를 중시했다. 획일적인 성리학에 몰두하며 전후의 도피처를 찾은 것이다. 나라를 개혁해야 하는 시기에 정당이나 이념이 다르면 사문난적으로 매도해 죽이는 풍조가 심화됐다.” (정병석 ‘조선은 왜 무너졌는가’) 

백영철 대기자 겸 논설위원
역사는 비극으로 되풀이된다. 구한말 조선의 망국은 삼전도의 굴욕 복사판이다. 역동적인 세계의 변화에는 담을 쌓고 한 줌의 권력, 가문의 세도를 지키는 데 급급했다. 비슷한 시기 일본과 비교하면 조선 지도자그룹의 위기관리 리더십은 빵점이었다.

당시 일본에도 청과 조선처럼 오랑캐를 몰아내자는 ‘양이론’이 있었다. 일본은 사무라이 국가이므로 주전론의 호소력이 더 강했다. 그러나 조선 지도층처럼 ‘죽어서 살자’거나 ‘살아도 죽은 것’이라는 식의 사변적이고 도덕교과서 같은 논란을 벌이지 않았다. 대신 차원이 다른 격론이 벌어졌다.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 “오랑캐와 맞서려면 적극적인 해외진출과 무역개시로 부국강병해야 한다”고 주창했다. 외세의 도전에 주도적으로 대처해 전화위복의 기회로 만들자는 데 초점을 모은 것이다. 권력을 지키기 위해 문을 닫고자 했던 막부세력이 동조, 기본노선을 부국강병론으로 바꾸면서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박훈 ‘메이지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나라가 발전하려면 국가역량이 강해야 한다. 나라의 힘은 현실에 바탕을 둔 전략적 목표와 노선을 뚜렷이 할 때 생긴다. 북한의 핵무장, 미국의 ‘아메리카 퍼스트’, 일본의 대미밀착 가속화, 중국의 사드 보복, 러시아의 남하정책이 한반도 주변에서 연일 충돌하고 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10년, 20년 후의 국가 안위를 내다보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것은 망국의 길이다. 도덕교과서의 전형 같은 외교안보라인을 쇄신하고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미·일과 손잡아 국가역량을 키워야 한다.

조선 지배층처럼 현실과 유리된 관념론적인 노선을 내세워 국가 쇠퇴를 초래하는 원인을 제공해선 안 된다.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들은 조선이 왜 실패했는지, 일본이 어떻게 강한 나라가 됐는지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백영철 대기자 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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