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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규칼럼] 나라 안팎의 혼탁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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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9-25 21:07:01 수정 : 2017-09-25 21: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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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말폭탄’ 공방으로 위기 고조
우리 정치권에서도 거친 말 성행
정치인 말·능력 신뢰 얻지 못하고
역사의 주요 고비마다 외면당해
고대 그리스 사상가 크세노폰이 쓴 ‘소크라테스 회상’에서 소크라테스는 이런 말을 한다. “좋은 지식은 말의 덕택이다. 잘 가르치는 사람은 말을 잘 활용하는 사람이며, 학식 있는 사람일수록 말을 잘하는 것이다.” 근대 초기 영국 사상가 토머스 홉스도 ‘리바이어던’에서 “말은 현자의 계산기로서, 현자는 오직 말로써 계산할 뿐”이라며 “인간 정신의 빛은 명료한 말”이라고 했다. 말은 이처럼 중요하다. 지식과 정신을 전하고 담아내는 그릇이다. 우리가 일에 치여 사느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말을 남발하고 있는 건 아닌지 반성해볼 때다. 나라 안팎의 말이 워낙 혼탁하기 때문이다. ‘말폭탄’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쓰인다.

지난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전면에 나서 험악한 말폭탄을 주고받았다. 인신공격성 발언까지 스스럼없이 내뱉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김 위원장을 “로켓맨”이라고 비난하고 “미국과 동맹을 방어해야만 한다면 북한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 외엔 다른 선택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에 맞서 김 위원장은 직접 발표한 성명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불장난을 즐기는 불망나니 깡패”, “늙다리 미치광이”라고 부르면서 “사상 최고의 초강경 대응조치”를 예고했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다시 김 위원장을 겨냥해 “리틀 로켓맨”, “분명한 미치광이”라고 했다. 문제는 이렇게 말폭탄이 오가다 보면 실제 폭탄으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관측이 확산되는 데 있다. 치열한 말싸움 와중에 한반도 안보상황은 심각한 위기로 몰리고 있는 것이다.


박완규 수석논설위원
우리 정치권의 말도 거칠기는 매한가지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는 국민의당을 겨냥해 “땡깡 부리고 골목대장질하는 몰염치한 집단”이라고 했다가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는 그야말로 막말로 다시 일어선 정치인이다. 바른정당을 겨냥한 “첩이 아무리 본처라고 우겨 본들 첩은 첩일 뿐” 등 막말 어록이 꽤 길다. 전형적인 노이즈 마케팅이다. 보수층 결집을 노린 전략적 발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래서인지 한국당엔 그를 본받는 이들이 많다. 김문수 전 경기지사는 “문재인 대통령은 김정은의 기쁨조”라고 했다. 정진석 의원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에 대해 “부부싸움 끝에 부인 권양숙씨가 가출하고, 그날 밤 혼자 남은 노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라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다.

정치는 말로 이뤄진다. 정치인에겐 말이 무엇보다 중요한 도구다. 말로 다른 정파와 싸우기도 하고 타협하기도 한다. 여기엔 마땅히 지켜야 할 선이 있다. 정치는 ‘함께 살아가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정치학자 박상훈은 ‘정치의 발견’에서 “민주정치의 이상은 강제나 억압보다 설득의 힘, 말의 힘을 통해 실현되는 공동체를 지향한다”며 “정치의 세계를 다루는 말과 언어가 좋지 않다면 그 이상에 다가가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그는 “말이 좋아지는 것 없이 인간관계나 공동체를 좋게 만들 수 있다고 상상하기는 어렵다”면서 정치인의 말이 불안정하다는 것을 한국 정치의 가장 큰 문제로 꼽았다.

이제 국민이 정치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다. 정치인이 도구를 잃어버린 것이다. 정치권의 비극이다. 이러다가 다시 선거철이 되면 많은 정치인이 유권자의 관심을 끌기 위한 말폭탄을 쏟아낼 것이고 정치에 대한 혐오감은 더 커질 것이다. 정치인들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몰고 온 촛불집회에 이르기까지 현대사의 중대 고비마다 자신들이 외면당하곤 하는 현실에 대해 심각하게 반성해야 한다. 정치인의 말이, 나아가 그들의 능력이 신뢰를 얻지 못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작가 이청준은 ‘떠도는 말들’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말들이 길을 헤매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제 말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너무나 많은 말을 하여 말들의 주소를 바꿔 놓음으로써 말들을 혹사했고 말들을 배반했고 결국에는 그 말들이 기진맥진 지쳐나게 했다.” 지금 그 배반당한 말들이 떠돌면서 세상을 혼탁하게 만들고 있다.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박완규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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