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육강식의 세계질서에서 필요한 것은 힘이고 지혜다. 힘은 군사력과 경제력에서, 지혜는 경륜과 현실감에서 나온다. 문재인정부가 인수위 없이 출범했다고 해서 어여삐 여기는 나라는 지구상에 없다. 선거운동과 국정운영은 다르다. 열정과 이상주의는 시처럼 달콤하다. 그러나 집권한 뒤에는 시를 버려야 한다. 공약을 지키는 데는 비용이 많이 든다. 책임도 뒤따른다. 현실은 산문처럼 차갑고 지루하다.
북한 미사일 도발이 거듭되는 상황이다. 이런 때일수록 두 개의 원칙을 공고히 해야 한다. 전략적으로 노선을 잘 잡는 게 중요하다. 전술적으로는 타이밍을 잘 맞춰야 한다. 문재인정부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외교안보의 축이 튼튼해야 한다.
백영철 대기자 겸 논설위원 |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자서전 ‘마이 라이프’에서 이런 문장을 인용했다. “우리가 정말로 외교안보 이슈에서 잘한다면 국민은 그걸 모를 것이다. 개가 짖지 않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가. 외교안보에서 성공하려면 관련 이슈가 신문의 머리기사로 나기 전에 막거나 완화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문제가 공개돼 골칫거리가 되지 않도록 미리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클린턴은 퇴임 시 지지율이 66%나 되는 경이적인 성공을 기록했다. 외교안보 현안은 가슴 대신 머리로 풀어야 한다는 클린턴의 경험담은 귀담아들을 만하다.
사드는 골치 아픈 현안이다. 한·미동맹을 굳건히 지켜내면서 중국을 달래야 하는 뜨거운 감자 같은 거다. 뜨거운 감자는 식혀서 먹어야 한다. 타이밍이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도 청와대가 정권 초기에, 그것도 한·미 정상회담을 코앞에 둔 시점에 일파만파로 키우고 논란거리로 만든 것은 수수께끼다. 국방부의 잘못이 크다. 사드 발사대 4기 추가 반입 사실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군통수권자에게 보고했더라면 긁어 부스럼 만들 일도 없다. 그렇다고 청와대가 면피가 되는 것은 아니다. 굳이 ‘국내적 조치’를 ‘매우 충격적’이라며 언론에 던져 줘 톱뉴스가 되게 한 것은 클린턴의 성공법칙과 크게 어긋난다.
외교안보는 상대가 있는 게임이다. 미국은 우리의 혈맹이지만 전례 없는 초강대국이다. 무엇보다 사업가 기질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시대 아닌가. 이런 미국을 상대로 게임을 할 때는 살얼음판을 지나듯 신중해야 한다. 우리로선 미국에게 잃은 점수를 중국에서 따야 본전이다. 청와대 요구대로 환경영향평가를 엄격하게 하면 사드 포대의 완전한 배치는 2년이 걸릴 수도 있다고 한다. 중국을 배려한 것임에도 중국은 못 본 체한다. 되레 사드의 완전한 철수를 요구하며 청와대를 압박하고 있다.
박근혜정부는 중국에 공을 많이 들였다. 그것은 북한을 압박하는 묘수처럼 보였지만 무용지물이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천안문까지 올라갔지만 돌아온 것은 치졸한 사드 경제보복이었고 북한의 미사일이었다.
국정운영은 시가 아니다. 오로지 힘과 국익이 언어인 국가 사이에 정의와 명분론, 근거 없는 낙관론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남한산성의 교훈은 오늘도 유효하다.
백영철 대기자 겸 논설위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