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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의 나마스테!] “詩는 천천히 오고 천천히 좋아하게 되는 더없이 느린 장르”

입력 : 2017-03-27 20:53:14 수정 : 2017-03-27 22: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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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전문서점 2호점 연 유희경 시인 창문 너머로 신촌 기차역이 보인다. 부유하는 미세먼지 사이 석양이 부옇다. 창가의 책상이 스러지는 빛 속에 아늑하다. 책상에는 기형도 시집 ‘입 속의 검은 잎’과 누군가 막 78쪽 ‘그 집 앞’을 베껴놓은 노트가 놓여 있다. 또 다른 누군가 석양녘 그 창가에서 다음 시를 이어서 베낄 것이다. 슬쩍 들춰보니 그 시는 “감당하기 벅찬 나날들은 이미 다 지나갔다/ …그리고 그 슬픔들은 내 몫이 아니어서 고통스럽다”(‘노인들’) 흘러간다. 유희경(37) 시인이 지난해 6월 문을 연 시집 전문서점 ‘위트 앤 시니컬’ 신촌점 풍경이다.

“한 달에 시집 한 권을 선정해서 다 같이 릴레이 필사를 해요. 이번 달은 기형도거든요. 늘 다른 형태로 이벤트를 만들려고 해요. 여기는 아직 한 달이 안돼서 어떡하면 좀 더 재밌는 걸 할 수 있을까, 계속 만져가고 있어요. 신촌 1호점이 규모가 더 크고 훨씬 세련된 느낌이라면 여긴 오붓하고 아늑한 공간이라 찾아오는 손님들과 일대일로 더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행사도 이런 형식에 맞춘 걸 기획하려고 해요.”


시집전문서점 ‘위트 앤 시니컬’ 2호점을 낸 유희경 시인. 그는 “시인보다 시에 더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면서 “시니컬한 반골기질은 예술가의 기본이요 살아내기 위해선 위트가 필요하다”고 서점 이름의 배경을 밝혔다.
서상배 선임기자
유 시인을 만난 곳은 신촌이 아니라 그가 최근 새로 낸 합정 2호점 ‘위트 앤 시니컬’이었다. 출판사에서 9년째 편집 일을 하다 망막에 손상이 생겨 오래 활자를 들여다보기 힘들어지면서 새로운 일을 모색하던 터에 신촌에 먼저 서점을 열었다. 신촌점이 호응을 얻자 다양한 행사를 기획할 공간을 더 확보하고 손님들이 편안하게 찾아올 서점을 추가로 연 것이다. 이 서점은 ‘샵 앤 샵’ 개념인데 ‘카페 파스텔’과 음반과 다른 종류의 서적을 파는 ‘프렌테’와 한 공간을 공유하는 형식이다. 자연스럽게 커피나 맥주를 마시면서 음악도 듣고 시인들이 돌아가며 추천하는 ‘오늘의 서가’에서 시집을 고르거나 책꽂이 서가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시집을 찾으면 된다. 시인 주인장과 시집과 시에 대해 편안하게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다. 동네 서점이 망해간다는 한탄이 들린 지 오래인데 새로운 형태의 서점이, 그것도 시집으로만 꾸리는 서점이 등장해 화제였다. 입소문을 타서 손님들은 끊이지 않는 편이고 시집은 한 달에 1000권 넘게 팔려나간다.

“예전에는 약속도 서점에서 잡고 그랬잖아요? 지금 서점은 그러기 어려운 공간이 되어버렸죠. 좀 더 매출을 올리는 데 신경을 쓰면서부터 부담스러운 공간이 된 건데 저희는 그냥 와서 놀 수 있는 공간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컸어요. 주변에서 모두 무모하다고 말렸지만 웬만큼 자신이 있었어요. 사실 서점보다는 문화기획 일을 좀 하고 싶었고 그 일을 하는데 공간이 필요했고, 그 공간은 책으로 채워져서 판매할 수 있는 공간이면 좋겠다는 바람이었죠.”

이 공간에서 기획한 대표적인 이벤트 중 하나는 ‘낭독회’. 통상 시인들이 다음 시집을 내기까지 시간이 걸리므로 낭독을 위한 소시집을 따로 200부 정도 제작해 판매도 한다. 오늘(28일) 저녁 합정 점에서는 새로 만든 황인찬 시인의 낭독시집 ‘놀 것 다 놀고 먹을 것 다 먹고, 그다음에 사랑하는 시’로 4번째 낭독회를 연다. 이곳의 낭독회가 특별한 건 아니다. 흔히 이루어지는 낭독회와 조금 차이가 있다면 ‘북토크’가 개입되지 않고 시인이 나와서 15편쯤 읽고만 들어간다는 점이다. 다섯 편 쯤 읽고 음악을 한 번 듣고 또 다섯 편 읽는 식이다. 주인장이 대표로 짧은 질문 세 개 정도 던지긴 하지만, 시인에 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주고받는 여타 낭독회와는 달리 쿨한 편이다. 처음에는 시인들도 시만 낭송하면 어색할 것 같다고 했지만 실제 체험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시 낭독만으로도 충분히 감흥을 느낄 수 있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시가 주인공이 되는 시간인 거지요. 귀로 들으면 시가 달라져요. 사실 시는 노래에서 온 거잖아요? 시인들도 처음에는 긴장하다가 자기 시를 읽기 시작하면 얼마나 잘하는지 몰라요. 저도 남의 시는 못 읽는데 제 시는 잘 읽어요. 출판사들에서 기획한 낭독회를 보면서 굳이 비싼 사회자 데려다놓고 쓸데 없는 질문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 시를 오롯이 들으면 훨씬 더 좋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평소에 컸습니다. 시인보다 시를 더 좋아했으면 좋겠어요.”

‘위트 앤 시니컬’ 2호 합정점.
이 공간에서 기획한 또 하나는 ‘두 시간 클럽’. 시집 한 권을 선택해 한 공간에 모여서 스마트폰 같은 기기를 끄고 책 읽기에만 몰두하는 시간이다. 주최측이 하는 일이라곤 시간과 공간을 제공하는 것뿐이다. 의외로 책 읽을 시간을 확보하지 못하는 이들이 태반이어서 이런 작은 배려만으로도 신선하다는 반응이다. 홈페이지를 통해 선착순 모집하면 이들 이벤트는 금방 30~40명 정원이 마감된다. 그는 “시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미지수이지만 시를 읽기 전의 나와 읽은 후의 나는 분명 다른 사람일 것”이라며 “시를 안 읽어도 잘 사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래도 읽으면 더 나은 사람이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이런 일들을 벌인다”고 했다.

유희경은 서울예대를 나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극작을 전공했고 2007년에는 희곡으로, 이듬해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가 당선돼 극작가와 시인으로 데뷔했다. 1만부를 넘긴 첫 시집 ‘오늘 아침 단어’에 이어 ‘당신의 자리-나무로 자라는 방법’을 냈다. 그는 “젊은 시인들이 시를 알아먹지 못하게 쓴다고 선배 세대가 통탄하기보다는 같은 길이지만 다른 방식으로 가고 있다고 이해해 주면 더 좋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작금 우리 사회는 이분법의 골이 너무 깊이 패어 있는 같다”고 말했다. 그는 “시의 세계에서는 그 골이 더군다나 어울리지 않는다”면서 “시는 천천히 오고 천천히 좋아하게 되는 더없이 느린 장르”라고 덧붙였다.

그의 첫 시집 해설자는 유희경 시의 키워드가 ‘슬픔’이라고 썼다. 그는 “사람마다 느끼는 지점도 다르고 깊이도 다른 슬픔이라는 감정에 늘 호기심을 느낀다”면서 “내 안에 물기가 많은 것 같다”고 했다. 청년기에 보낸 아버지가 그의 시들에 대체로 자주 눈에 띄는 편이다. ‘소년 이반’은 “아침 일찍 일어난 이반에게 부엌은 바람 없는 대나무 숲처럼 고요했다 아버지. 두고 간 얼굴을 주웠을 때 그것은 떨어뜨린 면도칼처럼 차가웠다”고 쓴다. 그는 시에서는 ‘비극’을, 희곡으로는 ‘희극’을 쓴다고 했다. 그는 “단순히 결말이 슬퍼서 비극이 아니라 슬픔을 극복하려는 노력 자체가 슬픔인 경우가 비극”이라고 했다. 그러니 “원형을 찾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시의 언저리에서 늘 실패한다”고 말하는 그의 시야말로 비극의 숙명이다. 그의 슬픔 하나는 이렇게 흐른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같은 사람이라서/ 수천 수백 수십의/ 같은 사람이 살짝/ 웃는 거라고/ 두 뺨에 손을/ 두 손을 이마에/ 번질 수 있도록/ 내어주는 거라고/ 같은 사람이라서/ 눈을 감는 거라고”(‘같은 사람’)

조용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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