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히 마음을 줘야 아름다운 끝 당도
미련 없이 나를 던질 그 무언가를 찾자
멀티태스킹은 원래 컴퓨터가 여러 개의 작업을 한꺼번에 수행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이제는 사람에게 더 자주 쓰이는 말이 됐다. ‘그 사람은 멀티태스킹 능력이 뛰어나다’라는 칭찬은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수행하는 다중적 사고가 가능하다는 뜻으로 쓰인다. ‘나는 멀티태스킹이 안 되더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자신도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싶지만 잘 안 된다는 식으로 답답함을 호소한다.
하지만 우리의 뇌는 실질적으로 멀티태스킹을 잘 해내지 못한다. 인간이 진정으로 멀티태스킹에 능하다면, 운전 중 휴대전화 사용으로 해마다 수많은 교통사고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대화 중 상대방이 휴대전화를 힐끗거릴 때마다 우리가 상처받는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데이비드 크렌쇼의 ‘멀티태스킹은 없다’에 따르면, 우리는 사실 ‘멀티태스킹’이 아니라 ‘스위치태스킹’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한다. 즉 두 가지 업무를 놓고 스위치를 이쪽저쪽으로 누르듯이 왔다 갔다 할 뿐이며, 그 속도가 워낙 빨라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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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 작가 |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하고, 동시에 여러 가지 걱정을 하는 우리의 두뇌 속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우리가 멀티태스킹을 하고 있다고 믿는 동안 실은 그 어떤 일에도 완전히 순수하게 집중하지 못한다. 이 일을 하는 동안에도 사실은 저 일을 걱정하고 있기에 이 일에도 저 일에도 완전히 마음을 주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뭐든지 한 번 끝까지 가 본다’라는 느낌을 갖기 어렵다. 정현종의 시 ‘어떤 풍경’을 읽으니 ‘끝까지 가본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느낌인지를 알겠다. “옥호가 ‘가보자 끝까지’이다/ 조개, 장어를 파는 식당./ 강릉 문화원 근처./ 조개를 먹는 일/ 장어를 먹는 일이/ 끝까지 가는 것임을 처음 알았다!” ‘가보자 끝까지’라는 가게이름이 시인을 웃음 짓게 한다. 아, 조개와 장어를 열심히 맛있게 먹는 일도 어딘가의 끝까지 가보는 일일 수 있겠구나. 그렇다면 저기 저 앉아 있는 노인은 어떤 끝까지 경험해본 것일까. “그 식당 앞에 노인이/ 정물처럼 앉아 있다/ 저 평상은 저 노인의 끝일까./ 어떻든지 간에/ 거기 노인이 앉아 있지 않으면/ 그 풍경이 말짱 꽝이라는 건 틀림이 없다,/ 노인이 풍경을 살려놓고 있다/ 노인은 끝내 꽃피었다.” 이렇게 시 한 편 끝까지 읽고 나니 ‘끝’이라는 것이 꼭 무서운 것만은 아니라는 것, 일상 속에서도 충분히 ‘아름다운 끝’을 순간순간 경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돌이켜보면, 완전히 마음을 주었을 때에만 끝까지 가볼 수가 있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도 무언가를 좋아할 때도, 사람이든 사물이든 내가 ‘끝까지 가본 것들’은 한 점 미련 없이 사랑하고 불타오르다가 더 이상 타오를 마음의 연료가 없어질 때까지 모든 걸 쏟아부었다. 나도 멀티태스킹을 한답시고 컴퓨터 화면을 여러 개로 나눠서 사용해본다. 그랬더니 일을 따로따로 나눠서 할 때보다 시간이 더 걸리고, 한 가지 일에 온전히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일도 그럴진대, 사람과 마음과 세상은 어떻겠는가. 가끔은 하루 종일 한 가지 일만 생각해보자. 이 사람과 함께할 땐 오직 이 사람에게 온 마음을 쏟자. 남김없이 불태우고, 후회 없이 사랑하고, 미련 없이 나를 던질 수 있는 그 무언가를 찾자.
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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