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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모든 흔적은 ‘상흔’ 길을 잃어도 두렵지 않아

입력 : 2017-01-19 21:08:01 수정 : 2017-01-19 21: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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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스한 위로의 소설들 남기고 떠난 정미경
소설가 정미경씨가 18일 오전 4시 떠났다. 향년 57세. 한 달 전 갑자기 돌이킬 수 없다는 암 선고를 받은 후 남편 김병종(서울대 미대 교수)과 내내 가까이서 대화를 나누다가 모든 치료를 거부하고 떠났다고 한다. 정미경은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폭설’이, 2001년 ‘세계의 문학’에 단편 ‘비소 여인’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6년 ‘밤이여, 나뉘어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녀의 작품세계는 따스한 위로의 정서가 지배하는 편이다. 동양화가인 남편 김병종과의 이화여대 기숙사 시절 연애편지 한 대목이 그녀를 표현하기에 적합할까. 남편은 이렇게 썼고, 그녀는 답장을 보냈다.

“날이 차오. 혹 생떽스의 글을 생각해본 적 있소· 우리를 무참히 죽여가는 것은 암울한 계절의 어두운 강에 다리가 없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던 사람. 그 다리의 이름은 휴머니즘이라고. 소등한 밤에 마지막 문을 닫고, 내 구두소리가 내는 소리를 들으며 낭하를 걸어나갈 때 춥고 검은 우수를 한 번씩은 경험하곤 하오. 가을날에 비하면 겨울은 아무리 순해도, 내면에 아문 상처의 잇자국을 남길 수 있는 계절인 것 같으오.”

“안녕. 책을 읽다 잠시 덮어두고, 그리운 이에게 편지를 씁니다. 책 글줄 사이로 문득문득 그의 웃는 얼굴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종교보다 강할 수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오늘, 학교 채플시간에 …나는 그가 있는 내 삶에 감사드렸습니다. 어쩌면 나의 고개 숙임은 신앙이라기보다 그에 대한 믿음과 사랑인지도 모릅니다. 언젠가, 나도 그만큼의 정말 믿음 있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아무래도 아직은 그 사람 속에 내가 있는 느낌인 것입니다. …안녕, 내 귀여운 바보.”

1981년 12월 저들이 주고받은 편지이다. 저들의 편지가 따스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녀의 삶과 이별하는 태도 때문에 더욱 그러할지 모른다. 그녀는 급작스럽게 닥친 죽음의 예감을 소문내지 않았고, 자녀의 결혼식마저 스산해진 몰골을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10년 전 소설집 ‘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를 펴냈을 때 썼던 서평 기사를 떠올리며, 한 세상 잠시 머무르다 좋은 소설을 남기고 간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건넨다.

- 그냥 살아도 힘든 세상, 힘들게 살아가는 인물과 어두운 세상의 진상을 들여다보는 행위는 사실 생을 따뜻하게 껴안으려는 역설의 몸짓이다. 행진곡보다 레퀴엠에서 더 위로받을 때가 많지 않은가. 뒤늦게 등단해 ‘오늘의 작가상’ ‘이상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활발한 작품활동을 펼치고 있는 정미경씨는 “모든 흔적이 상흔(傷痕)임을 알게 된다면 길을 잃는 것도 그리 두렵지 않을 것”이라고 작가의 말에 적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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