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고독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어찌 해볼 수 없는 불가항력의 포기 상태와도 닮았다. 아득한 슬픔을 동반한다. 낭만적인 감정일 수도 없는 것이, 낭만적이라 함은 언젠가는 회복될 기대가 어느 정도 내포돼 있기 때문이다. 출구가 없는 마지막이라는 공포와는 다른, 체념한 듯 받아들이는 깊은 슬픔과 닮은 정서가 저 마르케스의, 라틴아메리카와 ‘마콘도’의 고독이 아니었을까.
인간의 깊은 내면을 장엄하게 혹은 비통하게 정열적으로 파고들어간 북반구의 거장 도스토옙스키의 글은 가히 종교적 차원의 울림을 준다. 조국의 슬픈 현대사를, 라틴아메리카의 고독을 하얀 햇빛이 사철 내리는 남방에서 도스토옙스키처럼 직격하기는 난감했을 것이다. 마르케스는 ‘백년의 고독’에 직설적인 방식으로 조국의 고독을 담아내진 않았다. 현실과 환상을 치환하는 이른바 ‘마술적 리얼리즘’을 창안해 콜롬비아의 현실을 뛰어넘어 남미의 고독을, 더 나아가 인류의 저주받은 ‘고독’을 세기의 벽화에 굵고 깊게 음각했다.
최근 새로 출간된 ‘백년의 고독’ 습작노트 같은 마르케스의 첫 장편소설 ‘썩은 잎’을 접한 뒤, 그가 기록한 고독에 한반도의 고독이 겹쳐 떠오른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미국과 중국과 일본이 각축을 벌이는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운명의 ‘고독’을 마르케스라면 어떻게 표현해냈을까. 정권마다 되풀이되는 비리와 국정 난맥이라는 ‘고독’은 또 어떻게 녹여냈을까. 마르케스 소설 속 인물은 “노년기를 좋게 보내는 비결은 다름이 아니라 고독과 명예로운 조약을 맺는 것”이라고 했거니와 스스로 유폐되어 세상과 단절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일까. 소설 속 고독과 한반도의 고독은 같지만 다르다. 북반구의 반도에 사는 열혈 주민들은 되풀이되는 저주를 마냥 방치하진 않을 것 같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