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다문화칼럼함께하는세상] 한민족 유민의 아픔 뒤돌아보며

관련이슈 다문화 칼럼 함께하는 세상

입력 : 2017-01-11 21:21:39 수정 : 2017-02-09 16:57:46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선조들 나라 잃고 고통스런 타국살이
우리의 아픈 역사 통해 미래 헤아려야
한·일관계가 다시 냉각되고 있다. 최근 들어 한·일관계가 언제 화해의 무드가 조성되었을까 기억조차 흐릿하다. 일본 정부에서는 주한대사를 일시 귀국시켰다. NHK의 설문조사 결과 일본인 50% 이상이 일본 정부의 조치에 잘했다는 긍정적인 평가이다.

부산 일본 총영사관 앞에 설치된 일본군 ‘위안부’ 평화비(소녀상)를 부산 동구청에서 강제 철거한 뒤 전국적인 항의 빗발이 잇따르자 지난달 28일, 소녀상 재설치를 결정하게 됐다. 정부는 이제까지 일본 정부에 고수했던 태도와는 달리 동구청에 소녀상을 다른 장소로 이전할 것을 권유하는 입장을 밝히므로 결국 일본 정부의 요구에 굴복하는 외교 참사를 빚게 된 것이다.


이길연 다문화평화학회 회장
조정래 감독의 영화 ‘귀향’은 강일출 할머니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작품이다. 조 감독은 시사회에서, 돌아가신 위안부 피해 여성 20만명의 억울한 영령들을 넋으로나마 고향의 품으로 모셔오고 싶다는 바람에서 제작했다고 밝힌 바 있다. 제작자의 의도와는 달리 이 영화를 관람한 관객들의 반응은 스토리가 너무 슬퍼 눈물바람을 가누지 못했다는 측면과 영화의 내용이 모두 사실이라는 측면에 화가 나고 억울하고 분하다는 반응이었다. 어린 나이에 영문도 모르고 일본군에게 끌려가 말이 정신대지 일본군의 성욕을 해소하기 위한 노리개나 도구에 불과했다는 사실에 대한 인지였다. 그리고 나서는 역사 앞에 죄송하다는 고백이었다.

우리가 역사 앞에 머리 떨굴 일이 어찌 이뿐이겠는가. 우리나라가 국가적으로 열악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목숨마저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으로 흩어졌던가. 낯선 이국땅에서 겨우 목숨만 유지한 채 얼마나 유리방황했던가. 돌아오지 못한 영혼들이 어찌 ‘귀향’의 위안부뿐이랴.

재일본 한국교포는 일제 식민지정책의 산물로서 일제강점기 도일(渡日)한 한국인이다. 초기에는 일본의 경제적 수탈로 생계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는 일제의 징병과 징용정책에 의해 강제 연행됐다. 1945년 8·15 광복 당시 200만명에 달했던 재일 한국인은 일본의 패전과 함께 140여만명이 본국으로 귀환하고 나머지 60여만명이 계속 잔류하게 됐다. 현재에도 70만명이 넘고 있다.

고려인은 러시아를 비롯한 독립국가연합에 살고 있는 한국인 교포를 일컫는 말이다. 한국인들이 러시아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863년으로, 농민들이 두만강을 건너 우수리강 유역에 정착하였고 이어 1869년에는 4500여명에 달하는 한인이 이주했다. 스탈린의 이른바 대숙청 당시 연해지방의 한인들은 유대인 등 소수민족들과 함께 가혹한 분리 차별정책에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이주됐다. 당시 고려인 수는 17만5000여명에 달했다.

1992년 소련이 붕괴되고 러시아 외에 11개 독립국가로 분리되면서 고려인들이 거주하는 배타적인 민족주의 운동이 확산됐다. 이로 인해 고려인들은 다시 연해지방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으며, 현재 53만명이 거주하고 있다.

이주와 이민이라는 용어는 결코 우리에게 낯선 단어가 아니다. 머지않은 우리의 역사 몇 장을 걷어내면 바로 드러나는 우리의 민낯이다. 쓰라린 역사 가운데 우리의 자화상을 비춰보고 주어진 우리의 미래를 헤아리는 지혜가 필요할 때이다.

이길연 다문화평화학회 회장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리센느 메이 '반가운 손인사'
  • 리센느 메이 '반가운 손인사'
  • 아일릿 이로하 '매력적인 미소'
  • 아일릿 민주 '귀여운 토끼상'
  • 임수향 '시크한 매력'